[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정일이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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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미국북한인권위원회 김광진 객원연구원이 전해드립니다.

1980년대 말 어느 날 구라파주재 북한의 한 대사관에서 있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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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북 창성군의 한 지방산업공장을 방문, 현지지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무더위를 피해 냉풍기(에어컨)가 씽씽 도는 공관에서 대사관 부인들이 냉커피 한 잔으로 땀을 식히며 한가로이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의 평화로움을 깨며 전화종소리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평양에서 걸려온 예사로운 전화 같았습니다. 대사부인이 수화기를 들자 ‘정일입니다. 대사 동무를 바꿔주시오’라는 짤막하고 건방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여인은 기분이 잡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야, 정일이가 누구야?’라고 상대방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의아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 보며 외무성에 정일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도 불과 몇 초, 일시에 모두가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설마, 그 김정일 이가!’ 얼어붙은 대사부인은 엉겁결에 전화기를 놓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대형 사고를 치는 순간이었습니다. 부인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사는 ‘이제는 끝장이로구나’는 탄식과 함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해마다 평양에서 열리는 대사회의 소집일이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김정일의 분을 조금이라도 삭일 수 있을까 온통 고민하던 대사는 몇 년 동안 모은 생활비로 고급 양복지감 몇 벌을 끊어 선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기로부터 어느 대사가 올린 선물이라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쓴 오이 보 듯 양복지를 걷어차며 ‘그따위 안 입어’라고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김정일의 친한 측근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물을 고민하던 김정일은 불현듯 서기를 불러 ‘그때 그 양복지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서기는 ‘아차,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고 놀라면서 보관해 두었던 옷감을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대사부인이 ‘영명하신 지도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왜냐면 김정일의 목소리가 인민들에게 공개된 것은 1985년 ‘조국해방 40돌 경축 열병식’때 외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외마디뿐이니까요.

김정일이 목소리를 감추는 것은 신변안전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군사기술이 발전하여 말소리를 식별하여 공격하거나 도청으로 위치추적이 가능하다나요. 저는 듣다 처음이지만 휴대전화의 전파를 이용해 유도탄으로 개인을 공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위성으로는 지상의 벽돌보다 더 작은 물체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고요.

수십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김정일 동지 혁명역사’와 노작을 학습하고 충실성 교양을 받으면서도 순간적으로 헷갈리는데 3대세습의 주인공인 김정은은 어떨지 ‘걱정’됩니다. 김정은의 초상화를 또 만들어 배포하고 ‘위대한 청년대장의 혁명 활동’을 다시 조작하여 공부시킬 겁니다. 탁아소 젖먹이로부터 ‘가내 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김정은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불행해지겠죠. 더는 그 이름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3대 세습에 대한 불만은 북한에서도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이 청진의 소식통을 인용해 전한데 의하면 김정은을 공식 등장시킨 당대표자회의 후 열흘도 안 돼 평성 장마당 부근에 김정일과 김정은을 비방하는 삐라가 나붙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며 청진시 수남 구역에서는 ‘새끼돼지 어미돼지 모조리 잡아먹자’는 낙서가 발견돼 큰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북한과 중국소식통에 따르면 수도 평양에도 김정은을 살찐 곰에 비유한 반체제 삐라가 뿌려졌다고 합니다. 시내의 공장 담벼락에 ‘3마리째 곰이 나타났다. 너가 살찌면 우리는 야윈다’고 쓰인 전단이 붙었다나요. 이 삐라는 게시 방법 등으로 볼 때 외부의 소행이 아니라 북한 내부의 불만세력이 유포했을 거라며 보안 부서들이 공장 일대를 봉쇄하고 인근 주민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3대 세습에 대한 비난은 진화하여 남한의 동요인 ‘곰 세 마리’를 이용해 김 씨 일가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함경북도 회령 시 오산덕 중학교의 교실과 화장실에는 ‘한 집에 있는 곰 세 마리가 다 해먹고 있어, 할배곰, 아빠곰, 새끼곰, 할배곰은 뚱뚱해, 아빠곰도 뚱뚱해, 새끼곰은 미련해’라는 노래가사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원산 시 해방 동 해방고등중학교 학생들도 모여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다 보안부에 끌려가 밤새 조사받고 풀려났다나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정은이 구라파주재 그 대사관에 전화를 걸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제 생각에는 그저 정은이라고 하면 누구도 알아듣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3째 아들 김정은입니다’ 또는 ‘3대세습의 주인공 김정은입니다’ 이렇게 수식어를 깍듯이 붙여야 할 겁니다. 또 다른 방법이 있겠네요. ‘군사의 영재, 대동강 불꽃놀이의 영재, CNC개발의 영재, 세계에서 제일 나이어린 장군, 청년대장 김정은 입니다’라고 근사하게 소개하면 아마도 알아들을 수 있겠네요.

‘대동강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