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 청제비, 노제비

0:00 / 0:00

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친애하는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봄을 시기하는 꽃샘추위도 다 물러가고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날씨입니다. 제주도를 비롯해 남쪽에는 이미 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꽃피는 봄 계절은 따뜻한 날씨와 함께 자연의 만개, 제비도 불러오지요. 하지만 북한에는 특별한 ‘제비’도 나타납니다. 바로 ‘꽃제비’인데요, 집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고, 먹을 것이 없어 역전이나 도시, 농촌을 떠도는 방랑어린이들을 이르는 은어입니다.

요즘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청년들, 중년들, 노인들도 이에 합세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17세 이상은 ‘꽃제비’가 아니라 ‘청제비’, 40대 이상은 ‘노제비’라고 부른 다네요.

이들을 왜 ‘꽃제비’로 부르는지 명확치는 않지만 일부 북한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꽃피는 봄에 제비처럼 나타나는 어린 거지’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해방직후 러시아군이 ‘부랑인’이란 의미의 ‘코체비예’란 말을 쓴데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어원까지 들춰가면서 많이 떠드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과 함께 급속히 증가한 이들의 슬픈 사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이들의 비참 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잊지 않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북한정권에 큰 부담이 되고, 압박도 될 것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노동신문 1면에 정론을 여러 번 게재해 김정일의 치하도 받고, 접견을 받은 유명인이 남한에 와 당시 고난의 행군 참상을 시집으로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대표작은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인데요, 잘 읊지는 못하지만 한 번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초췌했다/-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그 종이를 목에 건 채/어린 딸 옆에 세운 채/시장에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팔리는 딸애와/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땅바닥만 내려 보던 이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고함치며 울음 터치며/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당신 딸이 아니라/모성애를 산다며/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딸을 판 백 원으로/밀가루 빵 사 들고 허둥지둥 달려와/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당시 대성담배공장에서 나온 인기 담배 ‘꿀벌’이 야매가격으로 50원이었으니까 이 여인은 자기 딸을 담배 2갑 값으로 팔았네요. 이 돈이면 또 집에서 뽑은 농태기(술의 은어) 4병을 살 수 있었죠. 참 가슴 아픈 실화입니다.

저도 평양에 살면서 많은 ‘꽃제비’들을 목격했습니다. 창광거리 2계단 식당, 처음에는 참 잘나갔죠. 여기에 예비 표를 갖고 가서 식사할 때의 일인데요, 밥을 미처 다 먹기 전에 식탁에 어린애가 나타나더군요. 예전에 없던 일이라 좀 당황해 급하게 먹고 일어서는데, 글쎄 그 애가 남은 국사발의 국물을 거침없이 쭉 마시더라고요.

어느 5.1절 날에는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싸들고 모란봉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밥을 펴놓고 먹는 사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꽃제비’들이 다가와 밥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의 ‘사회주의 낙원’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엄청 당황했었죠.

이뿐이 아닙니다. 저녁마다 집에 갓난 애기를 업은 여인이 매일 문을 두드렸고, 한 번 음식을 챙겨주면 소문이 나서 그런지 매일과 같이 다른 이들이 찾아오더라고요.

지금으로부터 벌써 20여 년 전 일이지만 아직까지 북한에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핵 보유 국, 장거리 로켓보유국’의 강성대국에서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동강 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