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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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러시아 유명감독 비탈리 만스키가 북한의 허가를 받아 찍은 기록영화(다큐멘터리) '태양 아래'가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25일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오는 27일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될 예정이고요.

사실 만스키 감독은 처음부터 이와 같은 '폭로 영화'를 찍으려 하지 않았는데요, 북한 소녀 다섯 명을 10분가량 인터뷰한 뒤 아버지가 기자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고 답한 '진미'를 주인공으로 촬영하려 했다죠.

그런데 촬영과정에 부모의 직업도 바뀌고, 사는데도 훨씬 고급스러운 집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감독이 미심쩍어 촬영과정을 전부 몰래 수록하면서 지금의 영화가 되었답니다.

영화에는 진미네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도 나오는데요, 만스키감독은 당시 몰래 찬장을 열어보았다는군요. 그런데 찬장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모든 것이 다 조작이고 가짜라는 것을 눈치 챘고 내용들을 전부 찍을 결심을 하게 된 거죠.

'열썽이 말썽'이라고 당국의 지나친 개입이 결국은 화를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8살 난 예쁘게 생긴 평양 소녀 진미의 가정과 생활이 배경인데요, 가정집, 식사장면, 부모 직장, '광명성절'을 맞으며 소년단 입단, 김정일화 증정, 선물 수여행사 등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냥 평범한 평양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일상생활을 담는 것이었죠. 그리고 2013년에 개원한 옥류아동병원도 나오고, 어린이들의 면회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너무도 한심한 것은 이 모든 촬영과정이 북한당국의 지시와 연출, 조작에 의해 세팅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미의 집도 가짜, 부모의 직업도 가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 대화 하나하나가 본인들의 것이 아닌 연출가들이 시킨 결과물이라는 거죠.

심지어 부모들과 식탁에서 하는 대화도 옆에서 당국자들이 지시합니다. 옥류아동병원에서의 대화도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시키더군요.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절대로 숨길 수가 없는 거죠. 어른들이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서글퍼하고 긴장해 하는 모습, 나 어린 학생들의 순진한 모습들이 그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미의 우는 장면이 저로서는 가장 가슴 아프던데요, 통역원이 진미가 소년단에 입단했으니 앞으로 일상생활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가요라고 묻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좋은 일을 떠올리라고 하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고, 시를 생각해보라고 하니 외운 소년단입단 선서를 내려 읊더라고요.

북한에는 북한에만 있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 군중', '조직의 몸.' 북한이 그렇게 자랑하는 '태양민족,' '태양조선'의 구성원들이 모두 자아와 주체성, 개인성, 인간성을 상실한 극장국가의 한 부품, 연기조각에 불과하다는 표현이죠.

만스키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북한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간단한 자기 자신의 의사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번 다큐는 정권의 선전기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공포스럽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대동강 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