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은 행불

평양 양각도국제호텔에 있는 고려-글로벌 신용은행.
평양 양각도국제호텔에 있는 고려-글로벌 신용은행.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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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요즘 함경북도 청진에서 북한사상 초유로 은행털이 범죄가 발생했다고 해 외부세계가 떠들썩하고 있습니다. 신암구역에 위치한 조선중앙은행 지점이 지난 3월 4일에 털렸다죠.

주민들 사이에선 은행금고에 있던 북한원화 7천만 원 이상이 털렸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는데요, 출입문을 부수고 침투해 현금을 탈취해갔고 은행 내부자와 연계 되었을 수 있다고도 합니다. 지금환율로 치면 거의 만 달러가 되네요.

당 7차대회를 맞으며 최근 월급지급을 비롯해 현금거래가 대폭 늘었고, 또 강제적인 주민대상 헌금 차출로 더 많은 현금이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북한이 하도 폐쇄돼 있고 정보가 극도로 통제돼 외부세계에선 사상초유의 사태라고 하지만 사실 북한에서는 북한기준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들이 과거에 빈번이 일어났었죠.

2003년에는 평양에 있는 무역은행에 나무로 만든 가짜 수류탄과 권총을 가진 강도가 침입해 4만 2천 달러를 강탈해 갔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당시 범인은 강원도에서 군 복무 중이던 26세 청년이었는데 개인 치료비 마련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무역은행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인민보안성 경비원들이 24시간 무장보초를 서는 국가외환은행에서 사고가 발생해 그 충격이 두려워 당시에는 이를 감추려고 쉬쉬했었죠.

또한 보통강구역 경흥동에 위치한 당 39호실에서 운영하는 경흥외화상점에서는 많은 귀중품, 상품이 도난당하는 사건도 발생했었죠. 바로 뒤에 기차역이 있고 철로가 있어 순식간에 물건을 털어 사라져 버렸죠.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하던 대외보험총국에서는 2월 16일 명절을 계기로 중앙당 청사 3층을 사칭해 2만 달러의 현금을 사취해 가는 대형사건도 발생했습니다. 3층이면 김정일 집무실을 의미하죠. 즉, 김정일 명함을 팔아먹은 셈입니다.

당시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에 김정일이 무조건 잡으라고 해 전국 수사포치로 범인을 잡기는 하였지만 돈은 찾지 못했죠. 본인이 수사망이 좁혀와 겁에 질려 다 태워버렸다네요.

또한 북새거리에 있는 해외동포영접총국이 털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중앙기관이고 또 당 통전부에서 관리하는 기관에 도적이 들었으니 큰 비상사건이었죠.

함경북도 당위원회에 근무했던 탈북자에 따르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은행이 털렸다는 보고가 자주 올라왔다고 하네요. 오래전인 1976년에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가 중앙은행 지점의 벽을 뚫고 들어가 돈을 훔쳤다가 공개처형을 당한 사건도 있었고요.

어떤 사람은 대동강구역에 있는 외화상점인 외교단상점을 귀신 몰래 털었다 잡혔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정교해 대남스파이 부서에 발탁됐다는 사건도 있습니다.

북한에는 이런 유머가 있죠. '후불은 행불'이다. 돈을 먼저 받지 않으면 행불이라는 뜻입니다. 오랜 기간의 경제난과 인민생활의 어려움으로 사회적 신뢰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아마도 이번 은행털이 사건은 이러한 북한의 사회상을 반영한 사고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동강 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