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친애하는 북한의 청취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루하고 축축했던 여름철 장마가 가고 어느덧 새벽공기가 좀 쌀쌀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을철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황금이삭의 계절, 수확의 계절입니다. 올해는 비가 유난히도 많이 와 그런지 자연도 사람도 지쳐있어 더 반가운 계절인 것 같습니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이제 추수가 끝나면 곧 무더위는 언제이랴 싶듯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겨울이 찾아옵니다. 겨울하면 북한사람들에게 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조직별로 어김없이 하는 우등불모임입니다.
'우등불 타오르네, 불타오르네, 눈 속에 바람 속에 불타오르네, 아늑한 숙소야 날 잡지 말아, 우리들은 바라지 않네, 랄 라 - 우리는 청춘, 랄 라 - 우린 건설자, 랄 라 - 당의 부름에 너는 우리 길동무였네.'
사회주의건설장들에서 청춘을 바치고 있는 북한청년들의 노래입니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주제가나 같죠.
노래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우등불 타오르네, 불타오르네, 노래 속에 웃음 속에 불타오르네, 내 심장 불탈 때 너도 불탄다, 강물 같은 우리 마음처럼, 추억 속에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 우리가 가는 곳 그 어디나, 우등불은 불타 있으리.'
보천보전자악단의 경쾌한 반주와 조금화의 시원시원한 목청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도 물리치고 청춘들의 낭만과 열정도 상징하는 북한의 우등불은 재미있는 유머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어느날 백두산 선군청년발전소에 대한 군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남녀로서, 노중청 할 것 없이 제 손으로 밥술을 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언 땅을 곡괭이와 삽으로 내려치는 어려운 노동현장에서도 사람들은 유머를 잊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각 조직의 대표들이 앞장섰습니다. 먼저 노래 '우등불'의 주인공인 군 청년동맹 1비서가 선코를 뗍니다. '당이 불씨라면 우리는 불길입니다. 노동당이 불만 지핀다면 우리 청년동맹은 집체 같은 불길이 되어 당을 받들 겁니다.'
여기저기 돌면서 지원자들을 고무하던 군당책임비서는 청년비서의 결의에 기분이 확 좋아졌습니다. 단결의 중심, 향도의 정치조직인 노동당의 위상을 청년비서가 한껏 추켜세웠으니까요.
이때 옆에서 일만 수걱수걱 하던 군 직맹(직업동맹 위원회)위원장이 끼어듭니다. 왜냐면 북한에서 당, 청년조직 다음으로는 직맹이 제일 크니까요. 자기 순서를 잊으면 존재가치도 잃는 겁니다. '청년들이 불길이라면 우리 직맹은 숯덩이요.'
이만하면 다른 단체장들에게도 불길을 지피기에 충분했습니다. 집 텃밭에서 손수 키운 담배 잎으로 마라초(만 담배)를 두툼하게 말아 잎에 붙인 군 농근맹(농업근로자동맹)위원장이 질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을 다투는 중요한 자리니 여기서 밀리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이죠.
'당신들이 숯 덩어리면 우리 농근맹은 재요.' 재가 돼서라도 거름으로 당을 받들어야지 그렇지 않다간 어떤 변이 날지 모릅니다.
농근맹위원장은 한쪽으로는 안도의 숨을 깊게 내쉽니다. 하마터면 재도 안 차례질 뻔했으니까요. 다른 한쪽으로는 재를 선택한 자기의 재치에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든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여맹위원장이었습니다. '우리 여맹은 우등불의 연기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당신들은 불길, 숯덩이, 재 등 전체의 한 부분이지만 여맹은 불이 타기 시작해서부터 꺼질 때까지 함께 하는 존재란 뜻이죠.
이 유머를 통한 충성경쟁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저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런 탄성이 절로 났습니다.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
'대동강 이야기'에 김광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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