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11년간 조선인민군협주단배우로 생활하다 2003년 북한을 탈출해 2007년 영국에 정착한 63살 가명의 김서진 씨.
김 씨의 온 가족은 지금 현재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있습니다.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에서 일명 제 몇 호 관리소라고 불리는 곳인데요, 현재 북한에는 6개의 정치범수용소에 20만 명의 수감자들이 갇혀 인간이하의 지옥같은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김서진 씨 아버지. 그 후에 뒤따른 두 오빠들의 체포는 서진 씨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뺐어갔습니다.
항일혁명투사의 가족으로 북한에서 백두산 줄기의 대우를 받으며 살았어야할 이들이 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가족 중에 유일하게 외부에 살아있는 김 씨를 통해 북한의 실체를 들여다봤습니다.
기자: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기자: 북한에 계실 때 혹시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김: 협주단 배우, 10년, 11년, 먼저 협주단으로 갔어요, 그러다가 첼로를 잘 친다고 해가지고 만수대 예술단으로 갔어요.
기자: 선생님의 집안이 북한에서 중요시하게 여기는 항일투사 집안이라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집안배경이 어떻게 되는지요.
김씨: 엄마네 집안이 모두 항일투사예요, 지하활동을 해가지고 공개는 되지 않았어요. 그때 당시 교통성 체신국장을 했어요. 할아버지는 연길 감옥에서 돌아 가셨구요. 김일성 부대 나팔수 양씨가 다 우리엄마 친척들이에요. 김일성이 로혹산 전투 갈 때, 그때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 들려서 할머니가 닭이랑 삶아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김일성이가 양씨 가정을 잘 알아요. 그래서 김일성이 우리엄마 사춘이 중앙당 지도원을 했어요. 그때 김일성이 물어보더래요. 자기가 신세 많이 졌는데 지금 양씨네 가족이 몇 명이나 살아 있나구요.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일 항일 투쟁 하는 과정에 얽힌 사람들이예요. 우리 집안이…
기자: 북한에서 아버지 성함은 어떻게 되시며 왜 수용소로 끌려가셨는지요?
김: 김경건, 그때 아버지가 보건상을 하다가 죄가 없으니까 그냥 강직을 시켰어요. 친구의 연좌로, 서휘가 어떤 사람이냐면 전원회의 끝나고 체포하라고 최용건이가 체포하라고. 그때 휴식 때 서휘는 중국으로 뛰었어요. 서휘가 중국 팔로군 출신이었어요. 그 연줄로 아버지는 아무 죄가 없이 수용소로 보내줬어요…
기자: 아버지 외에 오빠들도 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했는데 왜 가셨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김: 오빠들도 그냥 연좌제예요, 성분 나쁘다는 것 때문에.. 큰 오빠가 끌려간 년도가 78년도.. 그저 차가지고 와서 물어도 안보고 가족까지 다 싫어 갔어요.
작은 오빠가 96년도인가 내가 가정살림하며 애들 2명 낳았을 때 잡혀 갔거든요…
기자: 아버지와 오빠들 때문에 본인은 어떤 피해를 당하셨는지요?
김: 제가 첼로를 전공했었잖아요. 만수대 예술단에 가서 예술활동을 하다가 끝내 문건 때문에... 그때 어떻게 되였나하면은 만수대 예술단 배우는 김정일이가 문건을 직접 다 검토를 하거든요…
기자: 가정환경 때문에만 수대예술단소속으로 김정일의 기쁨조로 발탁이 되려다 탈락되였다는데요 그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김: 만수대 예술단 같은 경우는 비밀이 얼마나 많아요. 예술인들이 하루 저녁 불려 가면 월요일날 아침에 와요. 김정일 부르면 며칠씩…
기자: 오빠가족의 행방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나요?
김: 내가 사람들한테 혹시 물어보면 요덕갔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큰 오빠는 청진에 있는 관리소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아빠는 전혀 모르구요.
기자: 국제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요?
김: 억울하다, … 죄없이 잡혀간 오빠와 조카들의 생사를 알고 싶다.
기자: 감사합니다.
김: 감사합니다.
북한의 어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는지 현재가 족들은 살아있는지 그저 떠돌아다니는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아무 것도 생사확인조차 모르고 있다는 김서진 씨의 가슴 아픈이야기는 소위 인민을 위한 선군정치를 한다는 김정일 독재체제의 인권현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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