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남한에서는 지난 6월 2일 2,307개 선거구에서 지방의회 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 교육감 등 나라의 일꾼 3,991명을 선출하는 대대적인 지방선거가 실시됐습니다. 특히 이번 선거에는 탈북자 최초로 3명의 탈북여성이 주요 정당의 추천을 받아 비례 대표 후보로 나서 눈길을 끌었는데요. 오늘 희망통신에서는 구의원 후보로 나서기 전부터 왕성한 자원봉사 활동으로 유명했던 김인실씨를 만나봤습니다.
이예진: 안녕하세요?
김인실: 네. 여기 너무 덥죠?

[강서구 신월동의 사무실로 어제 막 이사를 마친 탈북여성인권연대에서 김인실씨를 만났습니다. 아직은 이삿짐 마무리가 덜 되어 분위기가 조금은 어수선하고 냉방기인 에어컨 설치가 되기도 전이었지만, 제가 김인실씨를 빨리 만나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먼저 얼마 전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표정만은 밝은 김인실씨에게 선거에 대한 몇 가지 궁금한 점들을 물어봤습니다.]
이예진: 이번에 선거 때, 비례대표 후보로 나오셨잖아요. 계기가 있으셨어요?
김인실: 특별한 건 아니고 이 사회에 와서 우리사람들도 이 사회에 서기 위한 선구자가 있어야겠더라고요. 이 사회에 준비된 사람들이 조금은 있잖아요. 아직은 사회구성원으로 크게 인정을 안 해줘서 저희도 소리를 좀 내야겠다 싶었죠. 우리를 위한 정책에 같이 합류해서 특성에 맞게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 겠다고 생각했죠.
이예진: 자유선진당으로 나오셨죠? 후보로 나서기까지 과정은 어렵지 않으셨어요?
김인실: 자유선진당에서 먼저 비례대표로 추천하겠다고 했죠. 저도 처음엔 안한다고 했죠. 정치는 거대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비례대표지만 지역구에 참가해서 우리 설 자리를 우리가 찾아야겠다고 해서 지원했어요. 그 과정은 힘들진 않았고 선거 운동할 때 힘들었죠.
[자유선진당에서는 강서구에 김인실, 송파구에 최해연씨를 각각 구의원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했습니다. 또 한나라당에서도 인천시 구의원 후보로 탈북여성 최인영씨를 공천했죠.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최초라는 것에 많은 무게가 실립니다.]
김인실: 강서구 50만명 앞에 홀로 나선 거죠. 다른 당들은 홍보를 안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혼자니까 해야 하잖아요. 새벽 6시부터 차도 못 타고 현수막도 못 쓰고 연설도 못하니까 제 발로 다니면서 명함을 나눠주며 입으로 전달해야 하는 거죠. 구의원부터 차나 현수막을 쓸 수 있어요. 오직 저 자신이 홍보해야 해서 친구 하나를 데리고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혼났죠. 힘들었고, 밤에는 다리를 끌고 들어갔죠. 아무것도 못했죠. 물론 당선된다고 기대는 못했어요. 그래도 시작했으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예진: 다른 탈북자들이 안 도와주셨나요?
김인실: 제가 얘기를 안했어요. 우리 사람들이 생각이 좀 빨리 바뀌려면 힘들잖아요. 제 좋은 일을 하면서 도와달랄 순 없잖아요.
이예진: 표 차이는 많이 났나요?
김인실: 많이 났죠. 전국적으로 볼 때 꼴찌더라고요. 국민참여당이나 진보신당보다 못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송파나 다른 데보다 4.2%였어요. 다른 덴 3.7%. 그래도 10%가 안 넘었으니까 안됐죠. 너무 차이가 심하니까 실망스러웠죠.
이예진: 그래도 다음번에 도전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김인실: 네. 이제부터 준비를 많이 해야겠더라고요. 원래부터 선거와 상관없이 자원봉사를 했어요. 굿피플 NGO 단체에 가입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의료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지역구에서 많이 해야겠구나 싶었죠. 지역구에서 나에 대한 홍보를 많이 해야겠죠. 한 번 더 나가볼 예정이에요. 이번엔 그런 준비도 안했으니까. 용감하죠? 하하하
[굿피플, 좋은 사람들이라는 국제민간단체에서 봉사활동까지 하고 계신 김인실씨. 봉사활동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 나눠보겠습니다.]
이예진: 탈북여성들이, 남성들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나오게 된 걸까요?
김인실: 사실 탈북자 가운데 여성이 80%예요. 2만명이 도래하지만 여성이 80%되니까 여성들이 여성정책에 대해 더 많이 머리를 써야하고, 남성들도 하는 게 있지만, 여성들도 소홀히 하면 안돼요. 그래서 많이 준비하고 나서야 하는 거죠. 앞으로 정계에도 나서서 정책 지원하는 데 우리만의 특성을 살려서 적절하게 요구할 수도 있고, 얘기할 수도 있죠.
이예진: 탈북여성인권에 대해 아직은 미비한 부분이 있죠. 이번에 공약은 어떤 걸 내세우셨어요?
김인실: 우리도 준비된 사람이 때로는 있어요. 아직은 사회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덜 돼 있죠. 안타까운 게 각 구청이나 동이나 이런 데에 요직에는 못 들어가도 그래도 밑부터 채용해서 준비를 시키면 전반적으로 사회가 우리를 보는 것도 사회가 우리에게 관심을 많이 주는구나. 이런 걸 더 느꼈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부분이 많아졌죠. 저는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다른 구보다 앞서게끔 준비된 사람을 걸러서 요소요소에 배치하려고 했어요.
[강서구에는 탈북자를 위한 임대아파트가 몰려 있는 편이어서 탈북자들의 숫자가 9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는 600여명. 이번 지방선거 투표는 8명의 일꾼을 뽑아야 해서 사실 남한의 어르신들도 많이 헷갈려 하셨습니다. 우리 탈북자 분들은 투표를 잘 마치셨을까요?]
김인실: 실수보다 세 명은 안 찍고, 자유선진당만 찍고 간 분들도 있고요. 나머진 모르니까 그냥 가고, 교육감이 누군지 뭐 알아요? 저도 선거운동하면서 누구 뽑아야겠다 싶었죠. 안 찍고 간 분들이 많더라고요.
[약 보름간 발로 뛰며 소리를 지르며 선거운동을 펼쳤던 김인실씨. 쓰러지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든든한 아들 덕이었을까요?]
이예진: 아들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인실: 조금 반대했죠. 한국에 온 지 6년밖에 안됐는데 어머니 아직 준비 안 됐는데 나가서 상처를 받는다고요. 기대는 안하니까 경험으로 할 테니까 걱정마라고 했죠. 이제 25살이니까 엄마가 같이 공약 좀 짜자 했더니 안 해주고 창피해하죠. 그래도 애 친구들이 다 전화했더라고요. 어머니 축하합니다. 이러면서요.
이예진: 결과 보고 아들이 뭐라던가요?
김인실: 그저 좋은 경험했다 하세요. 상처받지 마세요. 나도 각오한 거니까 걱정 말라고 했죠.
[김인실씨는 선거운동을 하느라 사이버대학교, 학교에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인터넷 강의를 통해 대학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사회복지학과 3학년. 상담심리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김인실: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서 다른 걸로 전공하려고요. 북한학과에 가려고요. 정치에 대해 조금 공부해보려고요.
이예진: 차근차근 준비하려고 하시는군요. 탈북자들이 정치참여에 생각이 없으신 거 같아요.
김인실: 거부를 하죠. 저도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나빠서 하고 싶은 걸 못했거든요. 우리 아들도 고려대학교 3학년이거든요. 아들 꿈이 외교관이예요. 일단 우리도 나설 때가 됐어요. 괜찮아요. 북한에도 저 때문에 제가 여기서 나서봐야 손해 볼 사람도 없고요. (북한쪽과) 전화통화 자주 하거든요. 비례대표 되면 난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같은 국회의원하고 있다고 그래야죠. 하하하. 이예진: 원래 봉사 활동 많이 하셨잖아요. 솔직히 여기 와서 나 먹고 살기도 힘들잖아요.
김인실: 남을 돕는다는 게 물질로 돕는 게 아니잖아요. 남을 돕기 보다 원래 나누는 걸 좋아했어요. 여기 와서 2004년에 일하면서 이제는 자원봉사 한다고 못 먹고 사는 게 아니니까 해야겠다 싶었죠. 우리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건 생각 못했죠.
[하지만 이제는 탈북여성인권연대에서도 나서고 있습니다. 지난 해 10월부터 희망날개라는 탈북여성들의 봉사단이 발족된 것이죠. 20명 정도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봉사활동을 하면서 작은 변화도 생겼다고 합니다.]
김인실: 무슨 시간이 있어 자원봉사를 하냐.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한번 해보고 나니까 느끼는 게 달라지는 거예요. 이래서 하는구나. 시간이 없어 못가면 왜 이번에 자원봉사 안하냐고 오히려 그래요. 우리 사람들이 노인정에 가면 자기 부모를 생각해서 눈물을 막 흘리고 그래요. 우리 사람들도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더라고요. 자원봉사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주고 싶어요.
[남한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아들을 따라 남한에 정착한 지 벌써 6년째. 여느 탈북자들처럼 벼락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성공적인 정착은 처음 1년이 중요합니다.]
김인실: 북한에선 별로 뭐 없잖아요. 앞으로 내 생이라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먹고 자고, 한 끼 먹으면 다음 끼 걱정하고. 한국이 괜찮다는 건 알았으니까 올 기회만 봤죠.
이예진: 북한에서 들었던 것과 직접 와보니 차이가 있던가요?
김인실: 남한에 가면 자연히 잘 살고 자연히 돈도 벌게 되고 천국처럼 생각했죠. 처음엔 힘들었어요. 직업이 없잖아요. 저도 거기에서 경리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하지만 거기는 주판으로 하니까, 처음에 1년간 애먹었어요. 죽고 싶을 만큼.
[처음엔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 넣는 일을 했던 김인실씨. 그 뒤로 회사를 다니다 지난해까지 노래방을 운영하면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술 마시고 온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아 그 역시 접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탈북여성인권연대에서 강수진 대표를 도와 사회적 기업 확장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예진: 앞으로 인생에서 이루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요?
김인실: 남한사회에서 사회복지에 대해 배워서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사회복지사업을 꾸리고 싶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복지에 대한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고 싶어요.
[53살이라는 나이가 아쉬울 만큼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김인실씨. 탈북자들의 편익 뿐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일에 온통 신경을 쏟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 선거에서는 당선 소감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습니다. ‘최초의 탈북여성 정치인 김인실씨’를 빨리 만날 수 있길 바라면서 오늘의 희망통신 접속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