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통신 특집: 굿모닝 베트남③] 호치민 기념관에서 한반도 통일을 논하다

동코이 거리에 있는 통일궁. 통일 전까지는 남베트남 정권의 대통령 관저였다.
동코이 거리에 있는 통일궁. 통일 전까지는 남베트남 정권의 대통령 관저였다. (RFA PHOTO/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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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희망통신 이예진입니다. 베트남으로 떠난 셋넷학교 아이들의 특별한 여행, 그 두 번째 이야기. 오늘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통일궁과 호치민 기념관을 가기로 한 '즐기조'를 따라가 봤습니다. 즐기조의 긴 하루,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근찬: 29000동. 싼 거 아냐?

윤정: 이 정도면 계획한 거에 맞는 거 같아.

근찬: 뭐 먹을 건데?

윤정: 팬케익도 있고 토스트도 있고 되게 많아.

[본격적인 여행을 하는 둘째 날 아침. 여행이 원래 그렇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도전으로 시작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침 일찍 숙소 근처 문을 연 식당에서 낯설지만 설레는 아침식사를 합니다.]

윤정: 여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근찬: 뭐래?

윤정: 괜찮대 우리가 어제 간 거에서 2배만 가면 되는 거잖아.

[식사를 마치고 식당 주인에게 다시 한 번 꼼꼼하게 길을 물어 확인하고. 자 이제 저희는 통일궁으로 갑니다.]

이예진: 베트남이나 라오스를 통해 온 친구들도 있잖아요.

근찬: 저는 중국, 미얀마, 태국으로 왔어요. 중국 가도 기분이 달라요. 그 때 당시는 쫓기는 신분이었고, 내가 다시 그 땅을 밟았을 때는 뭔가 거리낌 없는, 걸리지 않는 신분으로 그 땅을 밟으니까 울컥했어요. 그 때는 조마조마하게 불안하게 그 땅을 밟았는데 지금은 거리낌 없이 떳떳한 신분으로 가니까 감회가 새롭다는 친구가 많더라고요.

[근찬씨는 올해로 26살. 탈북한 뒤 자신의 학비를 벌었던 누나와 함께 중국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탈북한 뒤 중국에서 고생을 하는 대다수의 탈북자들과 달리, 다행히도 근찬씨는 누나 덕분에 초등학교도 졸업하고 중국어도 제대로 배운 편입니다. 지금은 공부를 좀 더 해서 공기업이나 무역회사 쪽으로 취업할 생각입니다. 근찬씨에게 이번 여행은 더 특별합니다. 어째 좀 친해 보인다 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조 윤정씨가 바로 근찬씨 여자친구더라고요.]

근찬: 일부러 짐도 안 들어줘요. 같은 조원들이 얼마나 외롭겠어요.

이예진: 저는 손도 잡고 다닐 줄 알았는데.

근찬: 손은 에이, 단체생활에서의 기본이죠.

이예진: 혹시 두 분이 미래도 약속하셨나요?

근찬: 늘 그런 마음으로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죠. 말로 하는 거 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결혼에 대해 서로가 얘기는 안 해요. 그저 현실에 충실할 뿐이죠. 요즘 그렇잖아요. 자기표현이 강한 세대잖아요. 그래서 싫다, 좋다가 강해요. 옛날처럼 보수적인 시각은 없어요.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네가 좋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그 땐 좋은 미래를 구상하겠다.' 하는 거지, 지금 좋은 것만 가지고 결혼해야겠다, 하진 않아요. 저도 존중하고요. 그리고 윤정이가 저한텐 과분한 여자죠.

[부럽기만 하던 이들의 달달한 사랑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죠.]

근찬: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거 같아요. 다른 나라와 싸워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잖아요.

이예진: 식민지로 있었잖아요.

근찬: 있었지만, 자기 힘으로 통일했잖아요.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는 서양에 대해 사대주의적인 인식이 있었어요. 잘 생겼고, 똑똑하고, 나라가 발전됐고. 하지만 한국에 와서 많이 깨졌어요. 한국인이라는 프라이드, 자존심을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이 참 똑똑한 민족이에요. 어려서부터 교육을 중시하고 부모님이 헌신적으로 자식을 위해 교육을 시키잖아요. 중국도 유럽도 안 그래요. 지식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현 위치에 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

[통일궁으로 향하면서 근찬씨와의 대담이 계속됐습니다.]

근찬: 북한은 폐쇄적인 국가에요. 외국 문물을 못 들어오게 하죠. 들어오게 하면 자기 세상에 심취하지 못하게 되고 배척할까봐 다른 세상을 못 들어오게 했거든요. 사람들을 뭐랄까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개방하면 김정일은 죽는 거예요. 개방하면 우리가 속고 살았구나를 깨닫게 되니까요. 김정일은 진퇴양난이에요. 개방을 하자니 자기가 죽을 거고, 안 하자니 먹고 살기 힘들고, 그래서 그물식 개방, 모기장식 개방. 한 마디로 개성공단 같은 걸 만들어 주고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거죠. 김정일은 개혁, 개방을 확대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자기 목숨과 연결돼 있으니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현재 손해를 보는 거 같지만 북한과 교류를 가지면, 북한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요. 한국이 자본주의라는 사상을 받아들여서 우리보다 잘 살고 있구나. 우리가 배운 거랑 다르구나. 두 번째는 우리가 김정일한테 속고 살았구나 알 수 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통일됐을 때 이념간의 싸움과 생각의 차이를 좁힐 수 있어요. 저는 개성공단 같은 게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어린 시절 북한을 떠났지만, 꽤 깊이 있게 생각하는 근찬씨를 보니까 들을 얘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벌써 통일궁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인데도 통일궁의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통일궁을 설명하는 베트남 안내원 소리)

[동코이 거리에 있는 통일궁은 1966년에 지어진 남베트남 정권의 구대통령 관저입니다. 1975년 해방군의 탱크가 관저로 진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종결을 맞게 되죠. 대통령 집무실과 접견실, 무도회장 등 100여개 이상의 방을 갖춘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구조인 통일궁에는 기대하던 문화유산이나 역사적인 기록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건물 지하에 다급하게 지어진 듯한 전쟁을 지휘하던 사령실과 암호 해독실, 통신실 등만이 당시 전시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해 첨단무기를 가지고도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던 이 곳이 전쟁 끝, 통일 시작을 알린 곳이라는 점에서만큼은 단연 의미가 있겠죠.]

근찬: 너무 오늘 피곤하다, 쉬고 싶다하면 호텔에 가서 쉬고, 그래도 체력이 좀 남았다 하면 사이공강 가서 노는 거야. 그게 좋을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괜찮지?

[오후 일정을 정하고 나서 근처 소박한 식당에서 각종 고기덮밥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따가운 햇살아래 발걸음을 호치민 기념관으로 재촉합니다.]

아이들: 이건 소수민족들인가봐.

윤정: 호치민이 소수민족을 잘 해준 거 아닐까. 탄압하지 않고.

[중심가와 조금 떨어져 있는 호치민 기념관에는 호치민 주석의 애장품과 베트남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사진자료와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근찬: 호치민의 죽었을 때 집을 봤는데 옷도 여러 벌 없고 기워서 또 입고, 기워서 또 입고, 집도 되게 낡았대요. 검소하게 살았대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았겠죠.

이예진: 누구랑 너무 대비되네요.

근찬: (웃음)

[호치민 기념관 2층 사이공강이 바라다 보이는 창가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던 사이, 근찬씨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집니다.]

근찬: 아 내 자식 때는 통일이 되나.

이예진: 그렇게 멀리 보고 있어요?

윤정: 네 좀 멀리 봐요. 왠지 지금은 그래요.

찬우: 저는 군대 안 갈거 같아요. 그 전에 통일돼서. 되야 돼요. 10년 안에.

근찬: 역사적으로 300만 명이 굶어 죽고 있는데 그 나라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 역사상 최초야. 300만 명이 죽으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데 북한이 유일하게 유지하고 있어.

이예진: 왜 그런 것 같아요?

근찬: 심화. 세뇌죠. 김일성이 최고고, 그 사람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고. 하지만 한계에 다다랐죠. 김정일까지는 먹힐 거예요. 김정일 이후로는 힘들어요.

[점점 토론이 진지해집니다.]

찬우: 베트남 정도만 되도 좋겠어요. 다 다닐 수 있잖아요.

근찬: 통일되면 가고 못 가고가 문제가 아냐. 50년 동안 너무 달라졌어. 북한은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더 강해. 그런데 남한에서는 한민족보다는 챙겨줘야 할, 우리가 퍼줘야 할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지. 이산가족 상봉 세대가 거의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그래. 우리가 쟤들이 뭔데 우리의 밥그릇을 줘야 하냐. 이런 말이 나올 거 아냐.

윤정: 실제로 별로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아.

근찬: 너도 그랬잖아.

윤정: 나도 그랬어. 나는 그냥 통일 안 되도 되니까 남한은 남한, 북한은 북한, 국가 대 국가로 왔다 갔다하고 관광할 수 있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이예진: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윤정: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도 같아요. 아직은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에 확신이 있지는 않아요. 그래도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은 있죠. 우리랑 통일하면 하향 평준화 될 거 같다 이러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이랑 그런 얘기 많이 했거든요. 왜 통일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 근찬: 통일 안 돼도 괜찮아. 별개라고 생각해. 그러면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통일 안돼서 혜택을 받고 피해 안 받고 살 수 있겠지만, 국가적으로 멀리 봤을 때는 통일되는 게 낫지 않나.

찬우: 군사비용도 많이 들잖아요. 무기도 계속 사고 있고.

근찬: 북한이 통일이 안 되면 중국이나 강대국에 소속될 수밖에 없어. 북한이 무너지면 그걸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김정일이 죽으면. 아들도 대체 못해. 내가 살아봐서 알잖아. 그러면 그걸 누가 바로잡겠어. 중국이야. 그러면 북한의 경제를 중국이 다 잡아. 정치적으로 자기네로 편입시켜. 그러면 중국의 속국으로 될 수밖에 없고. 불쌍하게 되는 거지. 중국이 지금 동북공정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수 있는 거죠.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를 동북공정이라고 합니다. 통일이 안 된다면 정말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겠죠.]

근찬: 같은 가족이라도 교류가 없고, 서로 말이 없으면 1년, 2년, 3년, 50년이 되면 형제라는 뿌리가 희미해져요. 친구도 그렇잖아요. 50년 안 보면 기억날까 말까 하는 남이죠. 하물며 민족이라는 틀로 50년이라는 세월을 적대시하고 교류가 없었어요. 그러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나중에 교류를 하고 알아 가면 또 모르죠. 옛날에 내 조상이 네 조상이었고, 같은 뿌리라는 것을 인식하면, 교류하면 좀 달라질 것 같아요. 50년, 60년 동안 너무 달라졌어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아요. 민족이라면 문화나 의식주, 생각이 비슷한데, 생각 자체가 달라요.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치군중, 정치집단이에요. 그러나 한국이라는 사회는 개개인이 존중받고,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는 나라에요. 그런데 북한은 아니죠. 정치적으로 하라면 한다. 그런 식이니까, 서로 만나도 할 말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우리가 너무 다르다, 60년 동안 너무 다르다. 그 다른 점을 계속 말해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예진: 윤정씨는 통일의 필요성을 어디서 찾아야 될 거 같아요?

윤정: 저는 가까운데서 찾고 있어요. 셋넷학교에 다니면서 소소한 일거리를 하는 사람 중의 하나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처음엔 크게 다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잖아요.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시간을 같이 있다 보면 같은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가까운데서 찾을 수 있어요.

수진: 어떻게 보면 한민족끼리 합친다는 게 간단해 보이면서도 이런 저런 것을 고려해보면 줄줄이 이어지고 해서 쉽지 않은 문제가 되잖아요. 그런 걸 보면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지,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통일을 하는 게 좋을 지, 좀 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아서, 쉽지만은 않다는 문제인 거 같아요. 여기 와서 보니까.

이예진: 그래서 우리가 통일여행을 왔잖아요. 좀 더 생각해 보시고 여행을 마치기 전에 얘기해 주시기 바라요.

[우리는 그렇게 통일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남은 이야기를 나중으로 미루고, 사이공강으로 향했습니다. 어쩐지 하루 새 아이들의 키가 훌쩍 커진 느낌입니다. 셋넷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는 베트남 여행기.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희망통신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