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한창 즐기겠죠. 제가 자랄 때면 겨울방학엔 방학숙제를 몰아 해놓고는 거의 하루 종일 개울에 가서 썰매, 쪽발기, 스케이트를 타면서 놀았습니다. 강이 없는 도시는 없으니 도시 아이들도 썰매타려 가기 힘든 곳은 거의 없죠.
아이들 겨울 방학은 얼음 위에서 지나갔습니다. 다만 요즘은 북에도 오락기구가 많이 들어가서 아이들이 얼음 대신에 집에서 게임하는 시간이 예전보단 많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북한과 비슷한 시기, 비슷한 기간에 남쪽 아이들도 방학을 맞습니다. 그런데 남쪽의 겨울방학은 북한과 비교하면 낭만이 없다고 할까, 아무튼 제 눈엔 불쌍해 보입니다.
제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당신은 어디서 겨울방학을 맞고 싶니"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북에서 보내겠다고 할 것입니다. 아, 물론 북쪽에서 배고프게 살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조건은 충족돼야겠지만 말입니다.
여기는 겨울에 아이들이 썰매 탈 데도 마땅치 않습니다. 남쪽 전체 인구 중 도시인구가 무려 91%입니다. 한국 인구가 5000만 명임을 감안할 때 4500만 명 이상이 도시에서 사는 겁니다.
여기 도시에도 물론 강이 있고 썰매를 타려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도시엔 사람이나 차가 붐비다보니 부모들이 아이 혼자서 개울에 내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여기는 대다수 아이들이 방학에도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공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20살쯤에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가는가에 따라 그 아이의 일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다보니 부모들이 아이들을 남보다 더 공부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겁니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태아의 정서를 발달시킨다는 음악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영어가 낯설지 말라고 영어 노래도 틀어놓고, 동화도 틀어놓고 그럽니다. 돈 좀 있으면 3~4살만 되면 영어를 사용하는 유치원에 보냅니다. 거기가면 우리말을 하지 않고 영어로만 말합니다. 그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영어가 낯설지 않고 대학갈 때 유창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와서 가방 내려놓기 바쁘게 학원가서 보충수업하지 않으면 남보다 앞서기는 고사하고 따라갈 수조차 없습니다. 남들도 다 학원가서 과외 받으니까 말입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보충수업 받는 아이들 어떻게 따라갑니까. 남이 학원 보내면 나도 보내야 하고, 남이 더 좋은 학원 보내면 나도 더 좋은 학원 보내고, 남이 유학 보내면 나도 유학 보내야 하고, 이런 지옥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선 겨울방학에도 놀이터에 가보면 노는 아이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럼 아이들 다 어디에 가 있을까요. 학원에 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라면 아이들이 대학갈 때쯤이면 머리에 든 지식이 엄청 많습니다. 대학까지 나오면 졸졸 외운 지식은 엄청 많은데, 문제는 이거 어디에 다 써먹냐 이겁니다. 물론 여기도 북조선 이과대학처럼 어려서부터 엄청 공부해야 하는 수재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죠.
정작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지식이 100 정도만 필요하다면 요즘 아이들은 한 300을 배우는데, 제 보기엔 200은 남과 경쟁하느라 쓸데없이 더 채워놓는 것입니다. 이러니 어린 시절을 낭만 없이 허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일하는 동아일보도 한국에선 최고에 들어가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하는데 사실 기자도 별거 아니거든요. 한국 교과서 한 줄도 들여다보지 않은 저도 잘만 하고 있습니다.
기자에겐 사회를 보는 눈과 논리, 필력 이런 것들이 중요한데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사회적문제가 잘 보이고, 논리나 필력이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특히나 어려서부터 졸졸 외우며 공부하면 독창성이 자랄 사이가 없죠. 글뒤주보단 고생도 많이 해보고 어려서부터 자기 힘으로 뭘 해보고 이런 사람이 기자도 잘합니다.
한국 사회의 학력과잉을 막으려면 학원부터 몽땅 없애고, 불법과외 처벌 수위도 높이고, 신고자에겐 상금도 주고 이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사회가 민주사회라 그런 강압적 방법은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닥치게 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이래저래 한국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만 많이 했는데, 사실 북조선 교육은 더욱 문제가 큽니다. 어려서부터 장군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불필요한 세뇌교육이 40% 이상 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을 공부시키지 않는 풍토에 있죠.
"간부집 자식들이나 빽으로 대학가겠지", "우리 집은 대학 보낼 돈도 없어", "어차피 우린 농민인데 버둥거려야 농민 신분 벗겠어?" 등등 갖가지 이유가 있죠.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다수 가정에서 "대학 나와야 뭔 필요 있어. 10년 군대나 다녀와서 팔자 맞게 살면 되지" 이겁니다.
북한처럼 신분이 딱 정해 있는 사회에선 가난한 집 자식은 아무리 아등바등해서 좋은 대학 나와 봤자 간부집 자식은 절대 못 이기는 것이죠. 태어날 때부터 출세할 놈 안할 놈 기본적으로 딱 정해져 있는 거죠. 그러니 간부 자식이 아니면 공부고 뭐고 어차피 갔다 와야 하는 군대나 마치고 장마당에서 장사해서 돈 버는 게 최고다 이렇게 여기는 겁니다.
남쪽에선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100이라면 불필요하게 경쟁해 300을 채워 넣느라 문제가 되고 북쪽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100이라면 대다수가 30도 채워 넣지 않아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남아도는 남쪽엔 학력도 남아도는데, 모든 것이 부족한 북쪽엔 학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이 현실, 참으로 쓸쓸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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