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한, 대한, 음력설도 다 지나갔으니 이제는 겨울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 특히 여러분 추모행사니 유훈관철투쟁이니 하면서 추운 밖에서 떨면서 고생 많으셨죠. 따뜻한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지내는 저는 사진으로 접하는 북녘의 모습을 보면서 참 가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저도 워낙 추운 고생 많이 해봐서 사진만 봐도 끔찍합니다. 저도 물이 어는 방에서 털모자에 동화까지 다 신고 잤었고 바람만 안 불뿐 기온은 밖이나 다름없는 교실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대학 때 꽁꽁 언 책상 위에서 필기를 하다 보니 새끼손가락이 동상을 입었는데, 지금도 겨울이면 감각이 얼얼해집니다. 그런데 젊어서 그런 고생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제가 많이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단 그런 고생을 몇 십 년 계속하면 억울하겠죠. 북에서 하도 고생해선지 여기 와선 겨울에 밖에 다니는 게 딱 질색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주 5일제를 하니까 겨울 주말 이틀 동안 쉴 때 등산이나 스키장 같은 곳에 많이들 놀려 갑니다. 겨울에 영화관도 가고, 오락장도 가고 할 수는 있겠지만 실외 활동으로 갈 만한 곳은 등산과 스키장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겨울 주말에 여러분이 서울 북한산 같은데 와서 보면 "남쪽 사람들도 우리처럼 겨울에 산에 동원돼 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법합니다. 그만큼 엄청 많은 사람들이 한 줄로 쫙 서서 산에 오르는데 머리 모자부터 발끝 신발까지 비슷한 차림새에다 배낭까지 똑같이 멘 모습을 보면 무슨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진 줄 알 겁니다.
그런데 등산 가는 복장 그거 일식으로 쫙 차려입으려면 최소한 몇 백 딸라에서 몇 천 딸라 듭니다. 저 처음 등산갈 때 그냥 겨울 단복에 운동화 신고 갔는데, 그렇게 입고 온 사람 수천 명 중에 저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북에선 동원 가서 대충 입고도 허리 치는 눈길을 헤치고 산 몇 개씩 넘어 나무를 해서는 어깨에 메고 끌고 왔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단복이나 신발이 얼마나 좋은 건데 그걸 입고는 안 옵니다. 차림새만 보면 히말라야 당장 올라가도 손색없어 보입니다. 스키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키장에 갈 때는 모두가 또 스키복이라는 전문 옷을 수백 딸라 주고 또 사서 입고 갑니다.
사실 별로 높지도 않은 산 한번 오르면서, 또 스키 좀 타면서 수백, 수천 딸라짜리 등산복과 스키복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거 입었다고 산에 더 잘 오르는 것도, 스키 더 잘 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남이 다 입었는데 나 혼자만 안 입으면 유독 멋쩍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너도나도 입는 것 같습니다. 북에서도 무슨 유행이 돈다면 너도나도 다 그렇게 사 입어야 좀 사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지 않습니까. 학교에서도 무슨 운동화가 유행이다 그러면 아이들이 다 그 운동화 사 신어야 축에 끼우죠. 여기 학교도 똑같습니다. 겨울에 입는 동복도 비싼 상표의 동복을 입어야 축에 끼운다고 애들이 너도나도 다 똑같은 동복 사 입고 다닙니다.
저는 이게 민족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살짝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이렇게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심리가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다른 아시아 나라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개성을 중시하는 서방은 확실히 한국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남 따라 입고 다니는 분위기는 북쪽이 남쪽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여긴 등산복이나 스키복 정도만 빼면 일상시 입고 다니는 옷들은 그나마 다 개성이 있고 비슷한 옷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북조선은 겨울 동복이 모두 단체 동복 같습니다. 어떤 동복인지 여러분 잘 아시죠. 장군님 동복이라고 하나, 아무튼 국방색 동복에 장군님 잠바 하면서 잠바도 다 국방색으로 맞춰 입어야 축에 끼는 것 같습니다. 중앙당 간부들부터 시작해 다 똑같습니다. 여자들은 어디 안 그렇습니까. 제가 탈북하기 전에는 홍영자 바지라면서 몸빼 바지를 너도나도 입고 다닌 것이 추세라고 그랬죠. 요즘은 또 어떤 추세가 돕니까.
일심단결을 외치면서 전체주의를 강화하다보니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고 무난한 것이 좋다 그런 심리가 형성됐고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따라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쪽도 일심단결은 외친 적은 없지만 모든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다녀오는 것처럼 사회 이모저모에서 단체 문화가 외국보단 깊게 배여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 와서 겨울에 또 인상적인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사람들은 옷을 정말 얇게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잘사는 나라니깐 겨울 의복들도 춥지 않게 잘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상점에 가서 내복 파는 것을 보면 정말 속이 비칠 정도로 얇거든요. 북에선 추우니깐 대신 내복 엄청 껴입고 털모자 쓰고 그러는데, 거기서 입는 동내의처럼 두툼한 내의는 여기서 사는 사람이 없으니 거의 찾아보기도 힘들고 털모자도 없습니다. 신발도 구두 신고요. 밖에 활동할 때 기준으로 보면 남쪽이 옷을 얇게 입었으니 겨울에 더 추워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처럼 무슨 집회한다고 광장에 몇 시간씩 세워두면 아마 몽땅 동상입고 쓰러질 겁니다. 저도 여기 식대로 겨울에 얇은 내복 하나 입고 바지 입고 구두 신고 이렇게 다니는데, 추울 때는 맵시부리다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자꾸 생각납니다.
저보고 "추운 곳에서 살다 왔으니 서울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니지"하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면 저는 "타향의 겨울은 춥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한답니다. 실제로 옷 얇게 입어서인지 서울의 겨울이 고향보다 더 덥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고향 뒷산에 다시 올라가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