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띠 해를 맞으며 바라는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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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음력설을 쇠면 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되는데, 올해는 흑사년, 즉 검은 뱀의 해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뱀의 해도 흑사, 청사, 백사, 황사, 적사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더군요.

여긴 연초에 운수를 보는 열기가 북한보다 훨씬 못하지만 길거리에 천막들 쳐놓고 단돈 10달러면 그해 팔자나 궁합, 사주 이런 것을 봐준다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토정비결이니 관상보감이니 이런 책들 다 펴놓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자칭 전문가들이 점을 봐주긴 하는데, 그걸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뿐더러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북한에는 엄격하게 단속함에도 불구하고 여기보다 훨씬 운수를 많이 봅니다. 제가 살던 동네만 해도 새해면 어디 가서 운수를 보고 온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람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제 생일을 아니까 새해만 되면 제 한해 운수라면서 적어가지고 찾아와 술 얻어먹고 갔습니다. 지금 보니까 그게 토정비결이란 것인데, 여기는 너무 흔한 책입니다. 그런 흔한 책도 북에는 매우 귀하니까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적어서 숨겨두는데 그거 있으면 사람들이 봐달라고 몰려와서 뇌물 주고 하니 해마다 되풀이해서 써먹을 수 있는 매우 귀한 재산인 셈입니다.

북한엔 또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들도 많죠. 어디 가면 아무개가 정말 기막히게 잘 맞춘다 이런 소문이 돌지 않는 지방이 없습니다. 저도 탈북을 결심했을 때 아까 말한 분이 저를 용하다는 어느 점쟁이 집에 데려갔습니다. 목숨 내건 길을 가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면서, 자기도 한번 가보려 했는데, 마침 잘 됐다고, 그 점쟁이는 정말 귀신같이 알아맞춘다 이러면서 저를 데려갔습니다. 앞길을 장담할 수 없는 사지로 나서면 지푸라기 같은 기대라도 갖고 싶은 게 인간인가 봅니다. 봐서 안 좋게 나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또 정말 점쟁이들이 신통력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가니까 40대 중반의 여자인데, 들어가니 말을 안 하고 계속 나를 살피는 겁니다. 사주 달라고 그러는데, 같이 따라간 분이 입이 열리니 "얘가 어려서부터 공부 잘해서 어느 대학에 가고" 이러면서 유도하는 대로 슬슬 다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런 거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려주면 안 되죠"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딱 한 가지만 기억이 남습니다. 뭐랬냐 하니까 "먼 길 떠날 팔자야. 물 건너가면 크게 되겠어. 다 잘 될거야" 이러는 겁니다. 제가 탈북할 거라는 것을 전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속으로 흠칫하면서도 어떻게 진짜 용하긴 한가보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쌀 2키로 값 주고 나왔습니다.

이후에 먼 길 가면 성공한다는 그 여자 말이 여러 고비 때마다 계속 생각났습니다. 탈북했다가 잡혀 보위부 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도 "난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그때 그 용한 점쟁이가 물 건너가 크게 될 팔자라고 했는데" 이런 생각이 늘 떠올랐습니다. 쌀 2키로 주고 잘될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졌으니 점 본 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죽지도 않았고, 물 건너와서, 지금이 잘 된 것인지, 아니면 잘 돼 가는 과정인지 모르겠지만 나름 후회되지는 않는 삶을 삽니다.

여기 와서는 점쟁이니 이런 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한국 온 뒤에 "그 귀한 토정비결책이 여기선 이렇게 흔하다니" 이러면서 그 책을 샀지만 안본지 너무 오래돼서 지금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앞날에 대해 불안하고 확신이 없으면 그렇게 미신에 매달리는가 봅니다. 헌데 지금까지 계속 의문입니다. 그 여자가 내가 남쪽 갈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면 대충 맞춘 것일까. 정말 용한 점쟁이는 있는 것일까.

저도 솔직히 북한에서 기차 타고 며칠씩 가면 때로는 놀리느라고 점쟁이 흉내 낼 때도 있긴 했습니다. 이건 예지력과 상관없는 심리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례로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어 속상하시겠습니다" 이러면 열에 아홉 사람은 "어떻게 알았냐"고 그럽니다. 솔직히 아픈 사람이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제가 "이마에 써 있습니다" 이러면 이 사람이 "그러냐고 또 뭐 있냐"고 이러며 달라붙는데 그때 손금 보는 척하면서 "착해서 남 믿었다가 손해 많이 보네요" 이러면 또 맞다고 그럽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착하고 손해보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정도 되면 내가 정말 대단한 관상가라도 되는 줄 알고 그 다음부턴 유도 안 해도 줄줄 자기 신세타령을 합니다. 제가 사기꾼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인간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때 그 점쟁이도 다른 말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떻게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이야 워낙 노련하니 나 같은 아마추어보단 낫겠죠. 아무튼 이런 걸 보면 사람이란 결국 자기 믿고 싶은 말만 믿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일단 한번 믿음이 생기면 다른 말은 안 들어오죠.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노동당이 잘 살게 만들어 준다는 거짓말을 20년 넘게 해오는데도, 계속 잘 살게 해준다는, 올해는 또 뭐 해준다는 이런 것만 귀에 담고 있지 않나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뱀의 해에도 무슨 사변들이 많이 납니다. 2001년에 9.11테러 있었고, 1989년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베이징 천안문 사건이 터졌죠. 1941년엔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뱀의 해는 뭔가 무너지고 터지는 해가 아닌가 생각해보면서 올해의 무너짐은 북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게 제 새해 소원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