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에게 살해당한 김정남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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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엔 지난주 제가 말씀드렸던 김원홍 해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김정일의 맏아들인 김정남이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 의해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한 것입니다.

이번 암살은 북한이 고용한 외국계 6인조 암살단이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던 김정남에게 접근해 VX라는 치명적 독극물을 얼굴에 뿌려 죽인 사건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라 요즘 한국 언론들은 연일 이를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동생이 형을 죽이는 패륜을 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김정남이란 이름은 여러분들에겐 생소하겠지만 김정은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많은 1971년 생입니다. 김정일이가 대학 때부터 여기저기 바람을 피우고 다녔는데, 그러다 자기 대학동창인 아태 부위원장을 지냈던 이종혁의 집에 갔다가 이종혁의 형수를 보고 반해버립니다. 그 형수는 당대 북한 최고의 배우였던 성혜림이었는데 나이는 김정일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습니다. 성혜림은 당시 북한 작가동맹위원장인 이기영의 장남 이평의 아내로 그때 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성혜림을 남편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기 자택에 데리고 들어갑니다. 졸지에 아내를 잃고 딸과 살게 된 이종혁의 형 이평은 그때 김일성대 연구사였는데 대동강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성혜림은 1971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김정남입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유부녀를 빼앗아 산다는 것을 알면 김일성한테 혼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일성도 알고 보면 엄청 바람둥이였죠. 1975년에 김일성이 간호사를 건드려 김현이란 딸을 낳자 김정일이 "이때 아버지에게 김정남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 자기도 잘못한 게 있는데 내게 어쩔건데"라는 생각으로 김정남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이때는 사실 아버지가 소개한 김영숙이란 여성과 살 때지만 김영숙이 딸만 낳아서 아들이 없으니 김일성도 김정남을 손자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서방에 망명한 김정남의 이모이자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2000년 '등나무집'이란 자서전에 다 쓴 내용입니다. 김정일은 1980년대 초반까지 김정남을 끔찍이 아꼈습니다. 성혜랑은 정남과 한집에서 살았는데 그의 회상에 따르면 김정남이 서너 살 때 쉬하고 싶다면 내의 바람의 김정일이 우유병을 들고 아들의 오줌을 직접 받아냈답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대여섯 살 때까지 밥상 위에 올려놓고 식사했다고 합니다. 당시 식탁 위에 앉은 김정남은 "빠빠 맛있니?" 하는 등의 애교 있는 말투로 김정일의 혼을 빼놓았다고 하네요.

김정남의 생일은 5월 10일인데 매년 4월 중순에는 호위사령부 2국 9부에서 김정남의 생일선물 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했는데, 매년 선물 구매액이 100만 달러였답니다. 김정일은 김정남이 태어난 1971년부터 스위스 유학을 떠날 때인 1980년까지 홀아비처럼 김정남만 끼고 자면서 '15호 관저'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평양 중심가 중성동, 즉 중앙당 안에 있는 15호 관저가는 김정일의 중앙당 집무실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걸어서 6분 정도 길이의 지하도가 나옵니다. 이 지하도를 김정일은 운동 삼아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합니다. 지하도는 대리석으로 돼 있는데, 폭은 4∼5m, 높이는 3m 정도였습니다.

원래 100평 규모였던 중성동 15호 관저는 김정남이 태어난 직후인 1973년에 500평으로 늘어났고, 1978년 1년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2000평 규모로 증축됐습니다. 김정일과 김정남, 성혜랑, 김정남의 외할머니 김원주는 1970년대 내내 15호 관저에서 생활했습니다. 특히 김정남의 전용 놀이방은 넓이만 300평이고, 김정남 생일 때마다 새로운 놀이기구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김정남이 새로운 장난감들을 잠깐씩 만져보고 살펴보는 데도 하루 이상 걸렸다고 하네요.

김정남이 열 살 때인 1980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김정일은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보다 더 슬퍼했다고 성혜랑은 증언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뒤엔 매일 부자가 전화를 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정남이 1989년 스위스에서 돌아온 뒤로 김정일과 아들의 관계는 소원해집니다. 그 사이 김정일은 새로 사귄 고용희에게 빠져 창광산 관저에 가서 살고 있었고, 다 큰 아들보다는 어린 고용희 자식들에게 정이 옮겨갔습니다. 김정일은 아들에게 딴 여자랑 산다는 것을 들키는 게 두려워 김정남을 동평양 85호 관저에 묶어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김정남은 1990년대 외롭게 갇혀 살다가 답답해 외국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함께 살던 고용희는 김정남의 행적을 일러바쳐 부자지간을 이간질했고 결국 자기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 자리에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김정남은 지금까지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이런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고, 김정은에게 "나는 조용히 살거니 날 좀 놔두었으면 좋겠다"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비정한 권력의 세계는 김정남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은은 집권 하자마자 김정남을 지구 끝까지 따라가 죽이라고 명령을 했고, 결국 그 명령에 따라 이복형 김정남은 13일 독극물에 살해됐습니다. 김정남이 죽은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형이기 때문입니다.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죽이고 고모 김경희를 매장시키고 형을 살해한 김정은의 악행을 우리 후손들은 앞으로 수천 년 두고두고 역사책에서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후손들은 북한 인민에게 "그 잔인한 독재자 밑에서 백성들은 그때 무엇을 했냐"고 묻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