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일성 회고록이 말해주지 않는 김일성 항일운동의 진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1930년대 초반 김일성이 이종락과 김광렬 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930년 초 길림감옥에서 나온 김일성은 갈 곳이 없어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로 찾아갔습니다. 이곳의 사령관은 이종락이 하고 있었고 군사부장은 김광렬이 하고 있었습니다.
김광렬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남창폭동까지 참가한 어마어마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이종락보다는 세력이 없었고, 제일 중요하게는 이종락이 국민부에서 나올 때 총 30자루가 있었기 때문에 사령관 자리를 이종락에게 넘기고 자신은 군사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혁명군에겐 총 구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과제였는데, 이 때문에 김광렬은 세금징수분대를 만들어서 김성주를 분대장에 임명했습니다.
처음으로 혁명군에서 분대장 자리를 얻은 김성주는 정말 사기가 나서 고유수, 카륜 쪽을 다니면서 조선 농민들의 집에 가서 돈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농민들이 내놓겠습니까. 강제로 뺏어내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고유수와 카륜 쪽에선 김성주에 대한 원망이 자자했습니다. 또 그쪽에 사는 조선농민들은 장백이나 무송 쪽에 대개 친척들이 있어서 김성주가 강도짓을 한다는 소문이 만주에 많이 퍼졌습니다.
김성주가 이때만 돈을 걷은 것이 아니라 화성의숙에 돌아온 뒤 반제반봉건투쟁을 벌인다면서 중국 지주집을 털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때가 열여섯쯤 됐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조선청년총동맹 남만부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 부대를 마골단이라 불렀습니다. 마골단은 중국인이던 조선인이던 아무튼 좀 살만한 집에 몰려가서는 "돈 내놓으라! 쌀 내놓으라! 소작인 풀어주라"며 별 호통을 다 쳤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혁명을 어떻게 할지 모를 때니까 무턱대고 어느 지주 아들이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패거리를 몰고 가서 습격했습니다. 지주집 마름의 얼굴에 보자기를 씌워서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참다못한 무송 지방 유지들은 당시 이 지역에서 조선인들을 대표하던 정의부에 가서 이 소년 불량배들을 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의부에선 이종락과 박차석이 지휘하는 독립군 소대를 풀어 마골단 20여 명을 모조리 잡아서 우두머리급 두 명은 몽둥이로 정강이를 부러뜨렸고, 나머지 아이들은 나쁜 짓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받고 손도장을 찍은 뒤 부모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또 중국 경찰에 알려지면서 중국 경찰에 아이들이 다 잡혔는데, 김성주는 이때 무송에 없어서 무사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김성주는 중국 감옥에 잡혀갈 뻔 했습니다.
물론 김성주가 열심히 조선 농민들의 돈을 빼앗은 것이 자기가 잘 살자고 한 것이 아니라 혁명에 쓰기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했다는 점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은 비적이나 마적과는 다른 목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강제로 돈을 걷었기 때문에 악명이 퍼져갔죠.
그러자 삼촌 김형권이 하루는 찾아서 김성주에게 이름을 당장 바꾸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하고 다닌 짓거리 때문에 너의 어머니와 내가 무송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고 얼마나 곤경에 빠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겨우 안도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는데 네 소문이 거기까지 퍼지면 정말 너의 어머니 처지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 김형권은 무송에 살 때 김성주 때문에 혼삿말이 있던 집에서 퇴짜를 맞고 장가를 못갈 뻔하기도 했습니다. 조카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생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송에 퍼져서 그런 집에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김형권은 나중에 안도현 흥륭촌에서 채연옥이란 중국 지주집 마름의 딸과 결혼했고, 아내가 임신 중에 함경남도에 군자금 걷으려 나왔다가 체포됩니다.
아무튼 삼촌까지 이름 바꾸라고 설득하니 김성주는 자기가 평소 존경해오던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개명하려 결심했습니다. 당시는 관공서에 가서 이름을 등록하던 시절이 아니라 자기가 고치고 싶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 뒤에도 세금징수 분대장인 김성주의 약탈행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록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징수한다고 내세웠지만 어쨌든 강도짓은 강도짓이죠. 이들은 길림과 장춘에서 처음에 약탈하다가 나중엔 흑룡강성 하얼빈까지 가서 약탈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성주와 함께 세금을 징수하려 다니던 현대홍이 하얼빈에서 부하 4~5명과 함께 복덕루라는 요리점을 습격하다가 반격을 받아 사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또 대형 사고가 벌어졌는데 1931년 1월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장춘에 총을 구입하러 갔던 이종락과 김광렬이 기차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조선혁명군의 수뇌들이 모두 일제에게 체포됐는데, 둘은 나중에 일제에게 전향을 합니다. 이종락은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1938년 김일성 부대에 귀순공작을 왔다가 김일성의 상관인 왕덕태에 의해 처형됩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대단한 혁명가였던 김광렬은 감옥에서 나온 뒤 귀순한 것이 부끄러워 울화통이 터져 죽었습니다. 김일성은 김광렬을 매우 따랐지만 나중에 전향을 해서인지 회고록에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종락과 김광렬 뿐만 아니라 김성주와 함께 세금징수를 같이하던 친구인 백신한과 김리갑도 장춘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백신한은 죽고 김리갑은 체포됐습니다.
이렇게 김성주가 초기 가담했던 이종락의 조선혁명군은 와해됐고 1931년 중반 김성주는 갈 곳이 없게 됐습니다. 다음시간에 계속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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