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태양절은 자본주의 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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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태양절이라 지금쯤 태양절 관련 각종 행사를 마치고 돌아왔겠군요. 4.15하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국 각지 각 단위별로 오전에 진행되는 체육대회입니다. 학교운동장에 모여서 꽹과리와 징을 두드리며 열심히 응원하고 뛰고, 아무튼 이유를 불문하고 봄날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날이 있으면 좋은 거죠.

점심 지나서부터는 거리마다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는 날이라도 마땅히 놀만한 거리가 없으니 남자들이 누구네 집에 모여서 주패를 치고 술내기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진 사람은 돈을 들고 술 사려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이 4.15의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평양에선 집에 있기 갑갑하면 모란봉 같은데 야유회를 나가기도 하죠.

혹 전기가 와서 TV를 틀면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이 하루 종일 나옵니다. 외국 세계를 전혀 모르는 북조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나마 외국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북에 있을 때는 워낙 정서가 많이 달라서 그런지 그냥 북조선 음악이 최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올해도 러시아, 폴란드, 로므니아, 볼가리아 등 동유럽권 문화예술인 200여명이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정부는 사람들에게 이 예술인들이 수령님을 흠모해서 와서 공연한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올해도 전세기까지 띄워서 예술인들을 불러왔습니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공짜 비행기에, 숙박도 공짜, 거기다 덤으로 관광도 하고 상금도 받고 하니 놀려가는 셈치고 들어가 노래하나 불러주자 하고 생각하는 거죠. 식량이 없다고 전 세계에 식량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런 행사에 수백 만 딸라가 넘는 돈을 탕진합니다. 요즘엔 저녁에 축포 야회까지 한다면서 중국에서 비싼 축포탄을 외화주고 사갑니다.

올해는 15일이 금요일이니 무려 3일을 놀겠군요. 하지만 북에선 4월 16일은 휴식일 아닌 휴식일입니다. 이날은 아마 북조선 농촌 사람들이 한 해 중 가장 열심히 일을 하는 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할까요.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죠. 북조선 당국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본주의 하는 날, 비사회주의 하는 날입니다. 바쁜 농번기에 천금같이 찾아온 이 시간을 놓치지 않고 텃밭과 소토지에 파종을 합니다.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감자씨를 묻고 강냉이를 심습니다. 협동농장에선 주체농법대로 강냉이 영양단지를 한다면서 난리를 치지만 개인들은 영양단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죠. 그냥 직파를 해도 얼마나 농사 잘 됩니까. 여름부터 개인 밭의 강냉이는 검푸른 색깔을 띠며 독을 쓰지만 영양단지를 했다는 협동농장 밭 강냉이는 연록색의 빛깔을 띠고 힘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농사는 결국 얼마나 비료를 잘 주고 잡초를 잘 잡아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주체농법 지킨다면서 교조적으로 영양단지를 꼭 심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정책에 반대하는 일처럼 간주되는 것을 보면 참 웃깁니다. 소토지가 산꼭대기에 있어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똥거름을 지게에 메고 산에 오릅니다. 평지에 있는 협동농장 밭을 그 정신을 가지고 가꿨으면 수확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냐 만은 협동농장 생산물은 자기 것이 아니니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죠.

농장소라도 관리하는 집은 태양절 연휴에 가장 신바람 납니다. 여기저기에서 술병을 갖다 주면서 밭을 좀 갈아달라고 하니 여기 가서 갈아주고, 저기 가서 갈아주고 나면 사람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여윈 농장소도 16일은 죽어납니다. 이렇게 열심히 자본주의 하다 보니 4.15 지나서 농장일 나가면 온 몸이 욱신욱신하죠. 소도 힘이 없어 눈만 데룩데룩 굴리면서 아무리 회초리질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나 소, 할 것 없이 눈치를 보면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보니 4.15 이후가 북조선 농장들에서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내 텃밭과 소토지에서 나는 것은 다 내 것이지만, 농장일은 아무리 해도 군량미니 뭐니 다 뺏어가니 말입니다. 소토지가 있으니 농촌 사람들이 그나마 굶어죽지 않고 버티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4.15가 없으면 개인 텃밭 일을 하기 쉽지가 않을 텐데 그나마 봄에 이런 명절이 있어 비사회주의 할 수 있는 날이 생기니 다행입니다. 눈치를 보지 않고 1년 내내 자기 일만 하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남쪽이 바로 그렇거든요.

그나저나 사람이 세뇌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서울에 와서 10년 가까이 살면서도 어김없이 4월 15일이면 "아, 오늘이 태양절이지"하고 떠오릅니다. 아마 그걸 노려서 북에서 이런 명절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태양절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그리고 또 김정은의 아들, 이렇게 김 씨 왕국이 대대손손 이어지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당연히 앞으로 태양절이란 것이 사라지겠죠. 하지만 지금 열댓 살만 먹어도 앞으로 늙어 할아버지 될 때까지 4.15면 "아, 이날이 예전에 태양절이라고 쉬는 날이었지"하는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태양절이라는 단어만 떠오르면 속아 살았던 옛날 생각이 나면서 정말 화가 나고 분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렇거든요. 그래도 그런 날이 빨리 와야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