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엊그제 5.1일 노동절 잘 보내셨나요. 예전엔 국제 노동절이나 3.8부녀절과 같은 국제적 명절을 북에서 어느 정도 크게 쇠었는데 해가 갈수록 이런 명절들의 의미가 크게 쇠퇴하고 행사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새 무슨 기념일이 얼마나 많이 생겨났습니까. 할아버지 기념일, 아들 기념일에 이어 이제는 손자 기념일까지 계속 생겨나니까 여러분들도 헛갈릴 지경일 겁니다. 작년에만 김정은 최고사령관 된 날, 원수된 날, 노동당 1비서 된 날, 국방위원장 된 날 이러루한 기념일이 벌써 몇 개 생겨났습니까.
김정은 생일도 앞으로 이제 태양절 광명성절에 이어, 이번엔 뭐라고 부를까요, 없으면 하다못해 보름달절이라고도 만들어 붙이겠죠. 사실 그믐달절하면 딱이겠는데. 저는 북에 있을 때 노동절이 사회주의권에서만 쇠는 명절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전 세계가 쇠더군요. 여기도 물론 공휴일입니다.
그런데 그냥 노는 날입니다. 북에선 명절 하면 직장별로 모여서 운동회 적당히 하고 점심에 둘러앉아 먹습니다. 여기서 제일 핵심은 술이죠. 명절준비 1번이 술 아닙니까. 명절은 그냥 술 먹는 날입니다. 직장에서 고기 좀 사서 뜯으면서 술 거나하게 마시면 정말 최고로 명절 잘 쇤 것입니다. 쫄쫄 굶다가 그날 술로 목 좀 축이고, 빼빼 마른 몸에 기름기도 좀 보충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쪽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각자 개인별로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냅니다. 명절에 직장 동료들끼리 모여서 잘 먹는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긴 명절이 아니라도 회사에서 수시로 단합을 한다면서 저녁에 회식이란 것을 벌여서 고기 구워먹고 술 마시면서 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저의 회사에서도 회식이 잦은데, 저는 다름 아닌 술 때문에 회식이 싫습니다. 폭음하면 건강에는 또 얼마나 안 좋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여기 젊은 세대들은 대다수가 술 마시기 싫어서 회식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북에선 명절의 가장 큰 의미가 술에 있지만, 여긴 바로 술 때문에 모이길 싫어합니다. 제가 가만 생각해보니 여기 회식 문화도 옛날 가난한 시절에 생겨난 풍습 같습니다. 여기도 회사에서 돈을 주어서 저녁에 고기 굽고 술 마시면서 놀면 그게 최고인 시대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가 발전하고, 먹을 것이 풍족하니까 이제는 개인이 중시되면서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은 거죠. 가족과 함께 보내든가, 가족이 없으면 낚시 가든 등산 가든 자기 취미생활을 하려 합니다.
여기는 그 어떤 가치보다 자기 스스로의 가치가 가장 소중합니다. 북에서 요새 계속 최고 존엄이 무시됐다 어쩌다 그러면서 계속 남쪽을 향해서 협박하는데, 저는 그때마다 여기 남쪽은 누구나가 최고 존엄이다. 이렇게 대꾸하고 싶었습니다. 5,000만 모두가 각자 자기가 최고 존엄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체사상의 기본원리는 사실 남쪽에서 구현됐습니다. 주체사상의 핵심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여기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북에선 하나의 최고 존엄이 있고 인민은 최고 존엄을 떠받들고 살아야 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여기 사람들이 떠받들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거죠. 회사에 나가 돈을 버는 것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잘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또 북에선 직장을 나라에서 다 배치해주지만 여기선 자기가 알아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 운명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 북에선 이런 것을 보고 개인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집단주의 한다는 북한이 돼가는 꼴을 보십시오. 집단주의 한다던 사회주의 다 망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가장 사랑하고 중시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그걸 무시하면 안 되죠.
여기도 회사에 나가면 아무래도 싫은 소리도 듣고, 머리도 숙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의 최고 존엄이 사장이 되고, 우리 부서의 최고 존엄이 부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장이나 부장의 지시를 듣는 것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부장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참는 거죠. 내가 화가 난다고 참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고, 그럼 내 아들 딸들이 먹고 살 돈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안에선 직원들이 머리 숙여도 이 사장도 밖에 나가선 자기 가족, 자기 직원들 먹여 살리기 위해 머리를 숙입니다. 이것이 리더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북에선 먹고 사는 문제보다 최고 존엄이 더 중요합니다. 최고 존엄이 무시당했다 이러면 인민이 굶어죽던 말던, 나라가 가난해지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요즘 개성공단 폐쇄해버리는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남쪽에서 언론이 김정은 욕 좀 했다고 개성공단 문 닫는답니다. 북한 언론은 마치 한국이 잘못인 것처럼 말하는데, 공단에서 노동자들 먼저 다 철수시킨 것도 북한이고, 심지어 월급 줄 달러를 싣고 올라가는 차까지 다 막아놓은 것도 북한입니다. 그래놓고는 남쪽에 책임을 들씌우는 겁니다.
아니, 남쪽 언론은 그래도 김정은에게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라고 꼬박꼬박 불러줍니다. 그런데 북쪽은 어떻습니까.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입에도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는 그러면서 남은 존경해 달라 이런 날강도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나저나 개성공단 노동자들은 노동절 직전에 모두의 부러움을 받던 번듯한 직장을 영영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개성공단 5만 3000명 노동자들과 수십만 명에 이를 그들의 가족들에겐 이번 노동절이 해고절이 돼버렸습니다.
부디 좋은 세상이 빨리 와서 북한의 노동자들도 명절에 술이 반갑지 않은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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