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생각한 민족의 미래

미국 워싱턴 DC의 항공우주박물관 1층 전시관 홀.
미국 워싱턴 DC의 항공우주박물관 1층 전시관 홀. (Photo courtesy of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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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주 워싱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와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 소감을 오늘 말씀드릴까 합니다. 호텔을 백악관 뒤에 바로 잡다보니 일정이 없을 때 평온한 백악관 주변을 산책하고 또 박물관도 여럿 구경을 했습니다. 미국은 박물관이 참 곳곳에 많은 나라인데,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에 자료도 엄청 풍부합니다.

워싱턴 박물관 중에 특히 항공우주박물관이 볼만했습니다. 이곳에선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부터 최신 우주선과 미사일까지 그대로 전시돼 있습니다. 라이트 형제에 대한 전시물을 보면서 저는 좋게 말하면 미국인들의 도전정신과 진취성, 나쁘게 표현한다면 양키들의 호전성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양인들은 식민지로 만들 새 땅을 찾아 목숨을 걸고 세계를 돌아다녔고, 인디안들을 몰아내고 땅을 빼앗았고, 최신 기술 장비를 만드느라 가산을 탕진했습니다.그런데 작은 반도에 갇힌 우리는 왕이 상복을 삼년 입니, 일년 입니 하는 문제 따위로 편을 갈라 수백 년 동안 서로 싸움질만 주구장창 해댔습니다.

얼마 전 강화도에서 조선 후기 화포가 발견됐는데, 임진왜란 때 만든 것을 300년도 썩 지난 19세기 중반까지 그대로 사용했더군요. 그러니 식민지가 될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지금도 우리는 분단을 70년 넘게 극복하지 못해 민족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고 있고, 우리 한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손에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최신 제품 등을 만들어 세계를 휩쓰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이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좋은 머리를 우리끼리 싸우는데 쓰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특히 북한을 보면 저런 독재국가라면 서양 사람들은 벌써 수십 년 전에 들고 일어나 무너뜨렸을 것 같은데, 북한 인민은 묵묵히 순응하고 사는 것도 화가 납니다.

미국에 갈 때마다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이 땅은 축복받은 땅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1만 미터 상공에서 둘러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정말 기름진 평야가 끝 모르게 펼쳐져 있습니다. 미국은 농부 한 사람이 북한이라면 한개 작업반 100명이 농사지을 30정보 넘게 땅을 혼자서 경작합니다. 그런데 미국인 데려다 북한에서 농사짓게 해보십시오. 세 정보 경작하기도 버거워할 겁니다. 미국은 몽땅 평야니까 비행기로 비료를 뿌리는 등 전면적 기계화를 도입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어느 곳에 가던지 산이 보일 정도로 평야가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사로 벌어먹고 살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느니 어쩌고저쩌고 했지요. 북한 인구 천 만 이상이 농사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행히 남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업 국가를 강하게 지향해 나가는 덕분에 지금은 알아주는 경제력을 지닌 나라가 됐습니다. 선견지명은 박정희가 김일성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런 지도자를 만난 덕분에 남과 북의 격차가 하늘땅 차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땅도 척박한 곳에 인구는 바글바글 살고 있으니 힘을 합쳐 세계를 개척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직도 힘을 못 모으고 서로 죽이겠다고 총부리를 맞대고 삽니다. 미국의 하늘에서 한반도와 중동을 떠올려봤습니다. 중동 역시 척박한 사막에 인구는 바글거리는데, 항상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도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닌데 늘 자기들끼리 싸우다보니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처럼 땅이 무연하고 인구는 적은 곳에선 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도요. 언제면 우리는 통일을 이루고 서로 힘을 합쳐 뭔가 이룰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버드대엔 처음 갔는데 감개무량했습니다. 북한에서도 하버드대는 유명한 대학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서울에 왔을 때 "김일성대를 졸업했으니 35살 전에 서울대에서 석사를 받고 하버드대 가서 박사를 받겠다. 그리하여 북과 남, 세계의 최고 대학을 모두 졸업한, 7000만 중 유일한 경력을 가지겠다" 이런 목표를 가졌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서울대는 탈북자는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대의 저에겐 그런 장벽은 겁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럼 내가 입학한 1호 탈북자가 되지"라는 도전의식이 생기더군요.

방법을 생각하다 황장엽 전 비서를 찾아가 전직 김일성대 총장 명의로 서울대 총장에게 "이 청년을 키워주세요"라는 내용의 소개신을 써 주십사 부탁했습니다. 황 전 비서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울대 석사 과정을 찾아봤더니 일하면서 다닐 수 있는 곳은 없더군요. 당시 저는 돈부터 벌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해 일해서 돈을 벌고 다시 오리라 생각했었는데, 동아일보 기자로 자리 잡고 치열하게 살다보니 서울대를 끝내 못 갔습니다. 동시에 하버드대에 가고픈 꿈도 날아가긴 했지만, 항상 마음속에선 하버드대 못간 것이 아쉬웠고, 지금도 1년 만 가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 곳을 15년 만에 갔으니 감격스러운 것이죠. 예전에 한국에 막 처음 왔을 때 신용기록이 없다고 은행에서 100달러도 빌려주지 않았는데, 이제는 10만 달러도 빌려 써도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1만 달러만 대출이 가능했어도 지금의 저는 김일성대. 서울대, 하버드대를 다 졸업한 박사가 돼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신 여러분들에게 이런 방송을 하고 있진 않겠죠. 하버드는 못 갔지만 저는 한반도 격변의 중심에 서있는 기자로 사는 삶이,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지금의 삶이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루빨리 김정은 체제가 끝나고, 북에 돌아가 여러분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날이야 말로 저의 전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