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이 농촌동원 현장에서 저녁식사 시간이 머지않았다고 주린 배를 달래며 마지막 힘을 짜낼 6시쯤 저는 텔레비전을 봅니다. 야구경기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텔레비 통로가 100가지가 넘어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도, 연속극도, 오락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저는 야구를 즐겨봅니다. 야구 같은 것은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월요일만 빼고 매일 경기를 합니다. 평일엔 6시 30분에, 주말엔 5시에 시작됩니다.
저도 북한에 있을 때는 야구란 경기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야구 경기를 처음 본 것이 '광주는 부른다'라는 영화에서 잠깐 등장한 장면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 넘어 대학 때에 운동장에 누군가가 야구 훈련을 하는 모습을 한번 어쩌다 보게 됐는데 야구 방망이와 야구공, 투수 장갑 이런 것을 처음 몇 십 미터 앞에서 구경했습니다. 그것도 딱 한 번 밖에 못 봤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축구나 즐겨봤지 야구는 규칙도 모르고 해서 티비에서 나와도 별 관심도 없었습니다. 처음 제가 보기엔 그냥 선수들이 쭉 앉아있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던지는 공을 툭 치고 달려가고 못 치면 다시 들어와 앉아있는 것이 뭐가 그리 재미있겠나 싶어서 그랬는데 3~4년 전에 외국에 나간 한 한국 선수가 아주 눈에 띄는 활약을 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받는 바람에 저도 얼떨결에 보게 됐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그거 틀어놓고 자기들끼리 응원하는데, 저도 "저건 왜 나가요. 저 선수는 왜 죽었어요"하면서 아주 초보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야구 규칙을 알아갔습니다.
알고 보니 이 야구도 축구 못지않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유명한 사람이 "축구를 비유하면 소설이고, 야구는 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그런 차이까지 음미하면서 보는 단계는 아니고요. 아무튼 지금 재미를 붙여가는 중입니다. 야구를 보면서 "야, 북한 사람들은 이런 재미도 못 느끼고,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북에는 야구가 없으니까요.
1980년대에 북에도 야구단이 생겼다고 말은 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북에 왜 야구가 없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야구가 자본주의에 딱 맞는 체육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는 나라들은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살게 한다면서 야구 같은 체육을 배척했습니다. 북한만 그런 것은 아니고, 사회주의를 한다던 나라들이 사정이 다 비슷합니다. 중국이나 로씨야나 지금은 개혁개방을 해서 자본주의 길로 들어선지 수십 년이 됐지만 과거에 혁명한다면서 야구를 안했던 전통이 있어 지금도 그런 나라들에선 야구가 인기가 없습니다.
야구 경기가 보통 6시 반에 시작하면 보통 9시, 10시에 끝나는데 북에선 혁명한다면서 사람들 들볶느라 어떻게 주민들에게 서너 시간씩 경기를 지켜보게 하겠습니까. 아마 그럴 시간이 있다면 강연회, 학습시키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고, 매일 하니 일주일로 치면 엄청난 시간입니다. 요즘 같이 정전이 계속 될 때는 설사 야구 경기를 방영해도 볼 수가 없겠죠.
북한이 야구를 하지 않는 또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야구를 하려면 야구장이 있어야 하는데, 넓고 평평한 땅에 골대를 세울 돌멩이와 공 하나면 수십 명이 즐길 수 있는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전용 구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경기입니다. 거기에다 야구공과 야구글러브, 그리고 야구 방망이까지 이런 장비를 모두 갖추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비슷한 이유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선 골프가 성장하지 못했는데, 이 역시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골프 이야기는 후에 또 따로 하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야구가 가장 자본주의적 스포츠인 이유는 광고 때문입니다. 한 경기당 공격과 수비가 무려 18번이나 바뀌는데, 이렇게 바뀌는 시간이 한 3~4분 정도 됩니다. 그러면 요 사이에 티비에서 기업들이 상품 광고를 합니다. 경기 한번 하면 광고를 무려 18번씩이나 반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기업들 입장에선 야구만큼 고마운 체육경기가 없는 겁니다. 미국 프로야구 결승전 같은 경우엔 광고를 1분 내보내는 대가가 30만 딸라가 넘습니다. 경기를 수억 명이 지켜보고 있으니 이때 광고를 내보내면 엄청난 홍보효과를 볼 수 있는 겁니다.
또 기업이 프로 야구단을 하나 운영하면 그 자체가 기업 홍보에 돈이 됩니다. 한국도 야구단 이름이 삼성, 엘지 이런 식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어느 선수단을 응원하면 자연스럽게 "나는 삼성팬이다. 나는 엘지팬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거대 기업들이 야구단을 운영하니 잘하는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엔 몸값도 어마어마합니다. 미국엔 1년에 무려 1000만 딸라씩 받는 선수도 적잖고, 한국에도 연간 100만 딸라 넘게 받는 선수도 있습니다.
제가 평양 모란봉구역 북새거리 공터에서 누가 최근 찍어온 사진을 보니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일부 평양의 부유층 자식들이 하는 것이겠고, 지방 사람들은 여전히 야구가 어떤 경기인지 개념도 없겠지만, 아무튼 평양에서라도 이렇게 야구가 시작됐다는 것은 보기가 나쁘진 않았습니다. 야구를 하면 야구 장비가 팔릴 것이고, 야구 장비가 팔리면 야구도 점점 확대되겠죠.
해방 전후에 우리나라에선 서울과 평양팀들끼리 축구와 야구 경기를 주기적으로 했는데, 이게 경평전이라고 유명한 대항전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도 풀리지 않는 북에서 아직 야구가 발전하는 날은 요원한 일이겠지만, 예전처럼 경평전이 다시 시작되고 서울 야구장에서 낙지를 안주로 맥주 마시면서 평양팀을 응원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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