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날씨가 왜 이리 무더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래 산 것이라 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옛날 6월 날씨와 요즘 6월 날씨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릅니다.
점점 봄과 가을이 줄어들고 대신 여름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지구 온난화 효과일까요. 예전에는 봄가을 양복 몇 벌은 필수였는데, 이제는 한 벌만 있어도 입을 새가 없는 것 같네요. 겨울이 지나 동복을 벗고 나면 한달도 안돼서 반팔 입고 다녀야 하고 가을도 마찬가지로, 반팔을 벗고 한달도 안돼 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무더운 날이 썩 반갑지 않습니다. 물론 겨울도 별로 달갑지 않아 봄과 가을이 제일 좋았는데, 제가 좋아하던 계절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더 슬픈 것은 봄을 느낄 새도 없이 떠나보낸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 일상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냅니다. 사무실은 겨울엔 뜨뜻한 난방이 보장이 되고, 여름엔 시원한 냉방이 와서 네 계절 모두 온도가 비슷합니다. 집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여름엔 아침에 시원한 집에서 나와 잠깐 걸어 지하철에 들어가면 또 시원하고 지하철에서 나와 바로 회사에 들어가면 또 시원합니다. 퇴근할 때 같은 노선을 되풀이해 집으로 가다보면 햇볕을 쬐일 시간도 별로 없습니다. 겨울에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집에서 나와 따뜻한 회사에서 일하고 다시 돌아가니 추운 때는 지하철역 안에 들어갈 때의 잠깐 뿐입니다. 정말 겨울에는 회사 출근했다 갈 때는 사실 동복 입을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봄 같은 경우 쉬는 날엔 산에도 가서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어디 공기 좋은 교외도 놀러 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일이 너무 많아 주말에도 실내에 박혀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이번 봄도 어떻게 지났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가을도 그렇게 지나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 어 하는 사이에 나이만 정신없이 쌓이고 있네요. 먼 훗날 은퇴한 뒤에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내가 뭐하려 이렇게 바쁘게 살았지 남은 게 뭐지 하고 되돌아보면서 잘했는지, 못한 건지 점수를 매길 때도 오겠지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 가나 비슷해 잘 사는 남쪽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편안하게 놀면서 부자 되는 나라는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북에선 대다수가 밖에서 육체노동을 하지만, 남에선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남과 북에서 다 살아본 특별한 체험이 있지만, 그 체험이 정말 특별한 것은 남과 북의 삶이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남에선 계절을 못 느끼며 살고 있지만, 북에선 또 그 계절을 너무나 크게 느끼며 살았습니다. 특히 대학생활 때 제일 그랬습니다. 기숙사나 교실이나 난방이 오지 않아 밖이나 날씨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요. 추운 날엔 아침에 일어나면 방에 물이 얼어있었습니다. 저희는 얼어 죽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것도 모자라 털모자와 동화까지 신고 자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등굣길에 오르면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이는 밖이 차라리 교실보다 따뜻하다 이런 생각도 했지요. 교실 역시 물이 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꽁꽁 언 책상 위에서 수업 내용을 받아 적다 보니 책상과 쓸리는 새끼손가락이 동상이 와서, 지금도 추운 날이면 이 손가락이 얼얼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 같은 남학생보다는 여학생들이 어떻게 견뎠는지 정말 처연한 마음이 듭니다. 그때 국가에서 난방을 주지도 못하면서도, 김정일은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것이 자기가 보기 기분이 나쁘다고 몽땅 치마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사실 제일 추운 때는 움직일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교실에서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90분 강의 3교시를 들을 때가 제일 추웠는데 남자들은 바지를 입었으니 안에 내복이라고 잔뜩 껴입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학생들은 내복도 못 입고, 치마를 입고 온 오전 냉방 교실에 앉아있었습니다. 만약 남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정말 지독한 여성학대라고 온 나라가 분노해서 들고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 북한에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대학 나온 여성치고 냉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상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대신 하루 24시간 영하 온도에서 지내다보니 북에서 10년 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름은 또 어떻겠습니까. 여기 남쪽은 분지 지역인 대구가 제일 높은 기온은 도맡아 기록하는데 평양도 만만치 않게 덥습니다. 우리는 선풍기란 말도 모르고 여름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씩씩하게 여름을 이겨냈습니다. 젊음의 힘일까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무리 더위에 단련된 몸이라도 열대야가 오면 견디기 어려운 때가 며칠씩 있었습니다. 방에서 견디다 못해, 다림실이나 복도에 나가 얇은 요를 펴고 자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거기라고 시원하겠습니까만, 대신 콘크리트 냉기가 좀 남아있어 약간 시원했지요. 대신 아침에 들어오면 빈대들의 공격을 받아 살 곳곳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었지요.
아마 이런 장면은 지금도 북한의 많은 대학들에서 되풀이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가 고픈 게 제일 견디기 힘드니 그까짓 더위나 추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쪽에 와서 추운 줄 더운 줄 모르고 살다 보니 제가 한때 어떻게 살았던 지도 가물가물해집니다.
그래도 이런 세상에서 살며 북한을 떠올리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춥지 않을 본능, 덥지 않을 본능 정도는 충족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날이 언제일까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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