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새는 텔레비 볼맛이 좀 나겠네요. 최근 몇 년 동안 중앙방송에서 외국영화를 과거에 비해선 자주 상영해주니 말입니다. 물론 정전이 계속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기 없이 사는 생활이 10년 넘게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자동차 바떼리를 충전해 보는 텔레비가 많아졌습니다. 설령 바떼리가 없더라도 외국 영화 할 때만큼은 동네에 바떼리 있는 집에 몰려가서 보잖습니까.
제가 북에 있을 때도 외국 영화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침부터 설렜고, 시간만 되면 텔레비 있는 집을 찾아 올려 뛰고 내려 뛰고 했습니다. 물론 요새 꾸준히 방영해주는 외국영화라고 해봤자 고망년 때 중국 영화와 소련 영화뿐이지만 그거라도 어딥니까. 텔레비에 외국인만 나와도 행복한 거죠. 고난의 행군 시절 기억해보시죠. 1990년대 후반에는 1년 되도록 외국영화를 단 한 개도 방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텔레비에서 방영되는 낡은 외국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걸 보고 한숨 또 한숨이 나왔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21세기 들어서서도 이미 10년 넘게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 북에서 요즘 방영해주는 중국 영화를 보십시오. '당의 딸'이니 '노예로부터 장군까지'니 하는 영화를 보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필림이 너무 낡아서 화질이 말도 아닙니다. 내용도 공산당과 모택동을 위해 한목숨 바친다는 것 위주인 것을 보아 아마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만든 영화 같습니다. 소련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중국과 러시아 사람들에게조차 그런 영화를 보여주면 젊은 사람들은 재미없다고 도저히 참고 보지 못할 것이고, 노인들은 "저런 시대에 내 청춘이 다 흘러가버렸지"하는 생각에 씁쓸함과 허탈함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국은 벌써 30여 년 전에 개혁개방의 길을 걸어서 경제는 이미 자본주의화가 돼버렸고 소련 역시 붕괴돼 자본주의로 간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쿠바도 이제는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북조선 하나만이 남들이 수십 년 전에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린 사상의 찌꺼기를 주어와선 인민들에게 보여주면서 당에 충성 다하라고 선전합니다. 필림이 너무 낡아서 흰줄이 쭉쭉 가고, 음질도 한심한 그런 고물 영화를 가지고 와서 인민을 세뇌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 기가 막혀 할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는 북조선 여러분들도 어지간히 알 것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까진 외국영화가 시중에 많이 돌지 않아서 저런 한심한 영화도 귀하게 보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여러분들도 최신 외국영화는 물론 한국 영화와 드라마도 적지 않게 보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외국은 물론 한국이 어떻게 사는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중앙의 선전일꾼들은 여전히 눈감고 아웅 입니다. 하긴 저들도 왜 모르겠습니까. 요즘은 높은 간부들일수록 더 기를 빡 쓰고 외국과 한국 영화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볼만한 것을 틀어주었다간 언제 트집잡혀서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안전빵으로 누가 절대 뭐라고 하지 않을 고물 영화만 틀어주는 것이겠죠. 1990년대 초반에 평양에서 '여인은 달이 아니다'라는 중국 드라마가 만수대를 통해 나오다가 개혁개방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가 되니 중간에 뚝 끊겨버리고 여러 간부들이 혁명화 나간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북에선 영화를 만들거나 수입할 때 너무나 금기사항이 많지요. 자본주의적 내용은 물론 개혁개방이란 말만 나와도 펄쩍 뛰지, 삼각연애는 절대 금지지, 혁명성이 들어있어야지 등등 각종 사항을 살피고 나면 결국 해당되는 것이 망해버린 사회주의 국가들의 낡은 영화나 고전 작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북조선의 사고가 50년 전에 갇혀 있으니 사는 것도 딱 5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 못한 것도 많죠. 사고 수준이 앞장서야 나라도 발전해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북쪽의 인민들은 낡은 중국 영화를 틀어준다고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당에 묵묵히 충성하면 나중에 장군님이 다 알아줘서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똑같은 내용의 영화만 벌써 수십 년째 지겹도록 반복 또 반복해 보다보니 그 낡은 외국 영화도 그냥 반가울 따름이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세상에 나오니 지금은 과거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저의 흘러가버린 세월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제 나이 정도의 북쪽 세대는 사실 '소년장수'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년장수만 한다고 하면 그날은 어른이고 아이고 완전히 정신이 없었고 시간 맞춰 텔레비 보러 가느라 전국적으로 달리기가 벌어지고 그랬죠. 북쪽 사람들은 소년장수를 보면서 "아동영화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이야"하면서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소년장수 다시 보니 예전의 감동이 전혀 살아나지 않네요. 너무나 잘 만든 세계적인 만화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도 '쿵푸팬더'라는 미국 만화영화가 전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웃 중국에서도 역사상 최다 관객 기록을 갈아 치웠다고 합니다. 이런 세계적인 인기영화들을 50년 전 영화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보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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