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모레면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인데 북에 계시는 분들 중에는 전승절이 정말 미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한 날이라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북한의 논리라면 오히려 남쪽이 전승절을 크게 기념해야 할 겁니다. 김일성이 스탈린의 무기 지원과 중국의 병력 지원을 등에 업고 시작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전쟁을 시작한 38선에 주저앉았으니, 패자는 김일성이죠.
제가 6.25전쟁과 관련해 이미 공개된 수많은 소련과 중국의 과거 극비문서를 직접 보여드릴 수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도 2006년부터 6.25는 북한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교과서에 박아 가르칩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전쟁을 시작한 쪽이 3일 만에 수도를 내주고 낙동강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렸단 사실이 말이 됩니까. 전쟁 직전 인민군 병력은 20만 명이 넘었고, 국군은 1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북한군 핵심은 중국 내전에 참전해 2년 넘게 싸우다 1949년 북에 들어간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 부대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시 북한엔 소련이 지원해준 수백 대의 땅크사단도 있었고, 또 수백 대의 비행기를 가진 항공사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6.25전쟁사를 다 찾아봐도 괴뢰군 땅크를 부셨다거나 괴뢰군 비행기 격추시켰다는 말을 봤습니까. 전혀 없는 게 전쟁 전에 한국군에겐 땅크도 비행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미군이 참전해서야 땅크와 비행기가 들어왔죠.
또 전쟁을 먼저 시작했다는 미군은 당시 한국에 없었습니다. 1년 전인 1949년 6월에 다 철수하고 남쪽에는 미 고문단 몇 명이 남아있었습니다. 병력도 절반에 불과하고, 북한엔 가득한 땅크와 비행기도 없는 국군이 북한을 먹겠다고 먼저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죠.
오히려 김일성이 미군이 철수하자 이때라 싶어서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병력도 훨씬 많고, 땅크와 비행기라는 가장 중요한 전쟁 장비도 압도적으로 우세하니 욕심이 났을 겁니다.비밀 해제된 소련의 문서를 보면 김일성이가 1949년부터 전쟁 전까지 박헌영 등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3번이나 찾아갑니다. 그리고 전쟁을 승인해달라고, 장비를 달라고 조릅니다. 결국 1950년 3월 스탈린 생일 때 찾아가 전쟁 승인을 받아냅니다.
중국에서 공개된 비밀 대화록을 보면 모택동을 찾아간 김일성은 병력을 달라고 합니다. 모택동이 만약 미군이 참전해 밀리게 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장담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정작 후퇴하게 되니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중국에 줄기차게 요구하죠.
김일성의 오판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1950년 1월에 발표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성명입니다. 미군이 태평양에서 일본까지 방위선으로 정한다는 내용인데, 그 바깥에 있던 한국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혔죠. 김일성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자기가 이길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결국 한국군 장병의 거의 3분의 1이 휴가를 나갔던 6월 25일 일요일을 틈타 전쟁을 일으켰고, 미군이 참전하기 전까진 한국군은 크게 무너져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습니다.
김일성이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니 탁월한 전략가니 계속 떠드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중국이 정보망을 가동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고 8월부터 알려주었는데, 산에서 많아봐야 몇 백명을 지휘해 본 김일성이 정규전에서의 상륙작전 위험성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인천방어를 할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도망칠 때보면 또 귀신같이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 1사단이 평양에 입성한 때가 10월 18일이었습니다. 그때 미군은 그래도 김일성이 사령관이니까 평양방어전을 지휘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김일성을 생포하겠다고 숙천과 문덕에 5000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해 퇴로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김일성이 10월 12일에 이미 평양을 떠나 도망을 친 겁니다. 12일이면 평양에서 한참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였는데, 부하들에겐 싸우라고 하고는 자기는 중국으로 도망치려고 저기 창성까지 부리나케 달아난 것입니다. 빨치산을 하면서 산에서 도망가는 것만 배운 모양입니다. 사령관이 그 모양이니 인민군이 다 괴멸됐습니다.
이번 7.27에 노병대회를 연다는데, 이중 낙동강까지 가봤던 사람이 거의 없죠. 왜냐면 남침 초기에 내려왔던 병사들은 거의 다 죽거나 포로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전쟁 때 북한군 포로가 15만 명이었는데, 태반이 후퇴 때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이 무기를 제때 지원해주지 않아 후퇴했다고 몇 번이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당시 소련과 중국은 사이가 대단히 나빴습니다. 약아빠진 스탈린이 중국엔 지원군을 보내게 부추기고는 자긴 뒤로 빠져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겁니다. 소련의 가장 큰 적수인 중국과 미국이 피터지게 싸워서 서로 약해지라고 말입니다. 무기를 지원해주어서 전쟁을 빨리 끝낼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죠.
결국 억울한 우리 민족만 3년 넘게 전쟁을 치르느라 500만 명 넘게 죽고 강토는 잿더미가 됐습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죽었으니 말이지 안 그러면 전쟁이 언제까지 더 끌었을지 모릅니다.
강대국의 힘겨루기에 우리 강토는 약자인 토끼처럼 피만 흘렸습니다. 이게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불행한 숙명이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민족이 흘릴 피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김일성 같은 인물들 때문에 비극은 더욱 커졌습니다. 6.25전쟁은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이 강토에서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뼈저린 피의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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