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여름 너무 무더웠죠. 서울도 폭염으로 8월 초에 한 열흘 동안 매우 고생이 많았습니다. 여기는 에어컨이라고 찬 바람이 나오는 가전기구가 있어 그나마 좀 낫습니다.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가면 시원하거든요. 그런데 선풍기조차 변변히 없는 북녘 여러분은 이런 무더위를 어떻게 견뎠겠나 싶습니다. 하긴 뭐 저도 북에 있을 때는 더워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참았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면 서울에서 제일 잘 팔리는 음식이 뭐냐 하니 바로 평양냉면입니다. 평양에 서울냉면 이런 식당이 있으면 이상하겠지만, 여기 서울엔 평양냉면이 아주 당연하게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여기저기 평양냉면집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냉면 하면 그냥 다 평양냉면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많은 것이 함흥냉면입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제외하면 남쪽에는 어느 지방을 대표하는 냉면이 없습니다. 평양냉면이라고 하는 집은 서울에도 수백 개가 넘을 것이고, 저기 부산, 대전, 목포 등 한국의 어느 지방에 가도 평양냉면집이 있습니다. 함흥냉면도 똑같습니다. 여기서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나 어떻게 구별 하나 하면 평양냉면은 육수에 빠진 메밀국수이고 함흥냉면은 농마비빔국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주는 식당은 평양냉면집, 육수가 없이 양념장에 농마국수를 비벼주는 식당은 함흥냉면집입니다.
참 이야기하다 보니 무더운 여름도 다 지나간 지금 철 지난 냉면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여러분이 방송 듣는 자정 무렵이면 출출하실 텐데 군침이 나오게 먹는 이야기해서도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와서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길을 지나가다가 함흥냉면집을 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농마국수였거든요. 그래서 "야, 서울에서 농마국수를 다 먹어 보겠구나"하고 들어갔는데, 이게 나오는 국수가 참 이상한 겁니다. 물도 없고 뻘건 양념장과 배를 썬 것, 계란 반쪽 이런 것이 국수위에 부어져 있는데, 훌훌 비벼먹다 보니 맛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정말 달아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원래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여기 음식이 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합니다. 여긴 음식에 사카린은 안 넣습니다만 사탕가루를 왜 그리 많이 뿌리는지. 저는 10년을 살아 어지간히 입맛이 적응됐습니다만 지금도 어떤 식당에 가면 달아서 못 먹습니다.
그 어떤 식당 중에 함흥냉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래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육수가 있는 농마국수거든요. 함흥에 동흥산 아래에 있는 신흥관, 평양 메밀냉면의 중심지가 옥류관이라면 함흥 농마국수를 대표하는 냉면집이 신흥관 아닙니까. 거기 냉면이 왜 남쪽에 와서 이상하게 달달한 회냉면으로 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북한 음식들이 대다수가 1950년대 월남한 실향민들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으니 일제 때 함흥냉면은 비빔냉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북한에서 알고 있는 함흥냉면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지금 북한의 함흥에서 파는 그런 농마국수를 먹고 싶지만 이상하게 남쪽엔 그런 식당이 없네요. 양강도 감자를 수입해서 농마국수를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지만 또 그런 음식은 여기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장사하다간 식당 망할 확률이 높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언감자 국수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구요.
함흥냉면에 비하면 평양냉면은 옥류관 국수와 비슷합니다. 물론 제 입맛에는 옥류관 국수가 최고고 여기 냉면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지만, 또 여기 사람들 보기엔 안 그럴 수 있죠. 과거 남북회담 때 평양에 취재 가서 옥류관 국수를 먹어본 제 신문사 선배들이 말하는 옥류관 국수는 너무 슴슴하답니다. 서울에도 1940년대 해방이 돼서 남쪽에 내려온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이 만든, 그때부터 따지면 역사가 70년은 되는 냉면집들이 몇 개 있습니다. 저도 잘 가는데, 가면 젊은 사람들보단 할아버지들이 참 많습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은 슴슴한 평양냉면은 싫고 단 평양냉면이 좋은 것 같은데, 유서 깊은 냉면집들은 맛이 슴슴하거든요. 그러니 옛 맛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같은 노인들이 많이 오는 것이죠.
하지만 40대 넘어가면 이런 음식도 입에 맞는지, 제 회사에서도 이 냉면집파와 저 냉면집파 이런 식으로 냉면 파벌이 존재합니다. 오랜 전통이 있어도 식당마다 맛이 좀 다른데, 그러다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냉면집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곳에 다 가 봐도 저는 옥류관이 제일 맛있습니다. 제가 옥류관 냉면 처음 먹어본 지도 20년이 넘었는데요. 아직도 처음 먹었을 때 너무 맛이 있어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냉면도 있구나"하고 감탄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가서 두 그릇 반까지는 먹고 배가 불러 더 못 먹고 두 손을 들었던 기억도 있구요. 제가 평양에 다시 가면 아마 제일 먼저 옥류관부터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8년인가 어떤 탈북자가 서울에 옥류관이란 이름을 딴 냉면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 대남방송에 대고 "서울에서 옥류관 상표 도용하는 가짜 냉면집이 생겼다"고 불어대서 여기 사람들이 "아, 그 식당 이름만 옥류관이고 가짜구나"하고 알게 되면서 몇 년 못 버티고 망했습니다. 이름만 옥류관이면 뭐합니까. 맛도 옥류관이어야 사람들이 오는 것이죠.
그렇지만 냉면집으로 유명해진 탈북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까지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에 마저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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