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 누린다는 수령복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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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여러분들의 몸만 떨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떨리실 것 같네요. 장성택 처형은 여기 남쪽에서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여러분들은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장성택 총살 후 북한에선 장성택을 규탄하는 집회가 연일 열리고, TV에선 치솟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느니, 용광로에 처넣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느니 하는 살벌한 말들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주민들의 눈빛은 하는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도 북에서 살았는데, 사진 속 여러분들의 눈을 보면서 그 심정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지하철에서 몰려들어 장성택 판결 보도가 실린 신문을 읽는 사람들의 눈빛은 온통 걱정 투성이었습니다. 당황하고, 걱정스럽고,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런 눈빛이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사망했을 때 여러분들의 눈빛이 그랬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지, 뭐가 달라질 것이지 이런 걱정을 하는 겁니다. 천세만세 살 것 같았던 수령이 죽었다니 당황도 하죠. 장성택 소식도 보면서 설마 장성택이 죽다니 이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떨릴 것입니다. 고모부를 죽이다니, 우리가 저런 지도자 밑에서 살아야 하다니, 이제 또 어떤 숙청 바람이 불 것인가, 설마 나는 피해가 없을 것인가 이러저런 걱정이 많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공개총살과 숙청을 지켜본 인민들입니까. 죽을 때 꼭 죄가 있어야 죽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잘 알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운이 나쁘면 어떤 누명을 뒤집어쓸지 모릅니다. 북한에서 당에서 하라는 대로 깨끗하게 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간부들도 걱정이 더욱 태산 같겠죠. 솔직히 북에서 장성택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던 간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장성택 일당이라고 했는데, 장성택 한번 만나도 일당이 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까지 처형해버리는 잔인함을 보였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이번 겨울에 정말 살벌해질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북한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 목숨이 저렇게 파리 목숨이 될 수 있을까, 저런 나라에서 공포에 질려 어떻게 살아가나 끔찍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밖에서 볼 때는 엄청 무서운데 내부에서 사는 사람들은 큰 거물 숙청이 아니고선 잘 모릅니다. 저도 예전에 심화조 숙청 때랑 평양에 있어봤지만, 그때 자고 나면 누가 없어지고, 또 한달 지나면 또 없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집에 숙청될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누가 없어지면 없어졌구나 이러고 말았습니다. 신문 방송이 전혀 보도하지 않으니 그럴 때는 그런 점이 심리적으로 도움이 좀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는 어느 지역에서 아주 잔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러면 전국 언론들이 그거 가지고 한참 떠듭니다. 그러면 온 나라가 다 알고 모두가 무서워지는 겁니다. 어떤 달에 이런 일이 이 지역 저 지역 세 번만 있다 그러면 요즘 살기 겁이 난다 이러면서 온 나라가 겁에 질립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더 많이 죽지만 보도가 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내 주변만 봅니다. 아마 한국처럼 처형이 있을 때마다 신문으로 떠들었다면 북한 사람들의 명은 지금도 가뜩이나 세계 하위권인데, 그런 뉴스를 날마다 접하면 최소한 10년은 더 빨리 죽을 겁니다. 북한이란 사회는 원래 전쟁터와 똑같습니다. 전장에서 싸우면 오늘 누가 죽고, 내일 또 누가 죽습니다. 그런 환경에선 얼마 안 돼 사람이 무덤덤해진다고 합니다. 그냥 죽었구나 이러면서 어쩔 수 없으니 그 상황에 만성적으로 적응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식입니다. 죽을 놈은 죽겠지 이러면서 체념하고 사는 겁니다.

전쟁 참가자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괴로웠던 일이 전투보다는 행군하던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추위 속에서, 배고픔 속에서, 졸음 속에서 걷고 또 걸어야 했던 육체적 고통이 목숨 걸고 전투하던 것보다 더 뇌리에 생생한 것이죠. 대다수 인민들도 처형될 공포보다는 당장 올겨울에 얼마나 닦달질 당해야 하지 이걸 더 걱정할 겁니다. 김정일 사망 뒤에는 애도 기간이라고 온 겨울 동상 앞을 왔다갔다 떨었고, 지난겨울에는 준전시라고 대피 훈련이니 뭐니 봄까지 엄청 시달렸죠. 2년 연속 추운 겨울에 밖에서 얼마나 시달렸습니까.

그런데 또 이번 겨울에조차 또 고생길이 훤히 열렸습니다. 장성택 여파를 숙청한다면서 각종 정치행사와 학습이 강화될 것이고 사회 분위기 다잡는다고 올 초처럼 준전시상태 또 선포할지 모릅니다. 땔감도 전기도 없는데 추운 겨울에 3년 연속 이게 무슨 고통입니까. 이것이 대를 이어 누린다는 수령복 장군복의 진짜 실체입니다. 김정일은 왜 하필이면 추운 12월에 죽었는가고 주민 모두가 속으로 원망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어디 죽은 잘못입니까. 또 김정은 잘못 만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김정일 아들 누구를 갖다 놔도 똑같을 겁니다.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독재와 왕조, 세습이라는 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공포를 통해 통치하려면 점점 예전보다 더 무섭게 놀아야 공포가 먹힙니다. 그러니까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제가 김정은이라면 누구나 "또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까" 걱정할 때 광폭정책(통 큰 정치) 하겠습니다. 용서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노는 걸보니 그걸 기대하진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간부들은 다음은 내가 되지 않을까 떨겠죠. 그런 공포를 이용해 복종시키고, 설설 기게 해서 통치를 하자는 것이 김정은의 목적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북한 주민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저도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였지만, 용감하게 바깥세상으로 탈출하고 나니 이제와선 여러분들을 걱정할 여유가 생기네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