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이 되면 남쪽 근로자들은 연말정산이라는 것을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기가 냈던 세금과 내야 할 세금을 비교해서 더 내야 할 것은 더 내고, 돌려받아야 할 것은 돌려받는데 대개는 돌려받는 몫이 더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몇 백 딸라 정도 돌려받습니다. 연말 정산 때는 자기가 1년 동안 번 돈과 쓴 돈이 다 종합되는데 저도 얼마 전에 했습니다. 그걸 하면서 보니 제가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받은 월급을 다 합치면 몇 십만 딸라는 되고 또 그만큼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많이 벌고 쓰고 했지만 제가 남쪽에서 제일 먼저 돈 주고 샀던 것이 무엇이었던지 회상해보니 TV 였더라고요.
처음 사회에 나와서 20평방미터 정도 되는 임대주택에 들어갔는데 새집은 아니고 누군가가 살다 간 집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청소해서 깨끗하게 만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집이 너무 휑하게 느껴져서 다음날 상점에 가서 TV와 휴대전화부터 샀습니다. TV를 봐야 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니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돈이 얼마 없기 때문에 50딸라 남짓한 중고를 골랐습니다. 좀 낡긴 해도 북조선 웬만한 가정의 천연색 TV보단 좋은 것입니다. 전날 밤 혼자 고독하고 썰렁하게 보냈는데 탁자도 없는 장판 바닥에 TV를 놓고 틀고 나니 그제 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TV를 보고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문화적 코드가 달랐던 거죠. 특히 여기 개그나 코미디 프로그램은 이해불가였습니다. 개그나 코미디란 것은 북쪽으로 치면 풍자극, 희극, 재담, 막간극 이런 것처럼 대중을 웃기기 위한 프로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우습다고 박장대소를 하는데 저는 저게 왜 웃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이제 한국 생활 10년 가까이 되니깐 이제는 그걸 좀 웃기긴 합니다. 이따금 TV에서 외국의 코미디 프로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웃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살아보니 문화라는 것이 간단히 생각할 게 아닙니다.
이따금씩 북에서 하는 재담 프로 같은 것을 저도 인터넷으로 보고 듣고 하는데 이제는요, 점점 북쪽 재담이 웃기질 않습니다. 북에 있으면 분명 재미있다고 했을 것인데, 고향 떠나서 10년 되니 벌써 문화적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심지어 재담에서 구사하는 평안도 사투리조차 어떤 때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쪽은 60년 넘게 미국의 문화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서양의 유명 배우들 이름은 웬만큼 다 압니다. 반면 북조선 사람들은 세계축구선수권대회 같은 것을 보면서 서방의 유명 축구선수의 이름은 좀 얻어듣지만 서방 배우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대신 북에선 소련이나 중국 문화를 많이 접했죠. 여기 사람들은 서방문화를 잘 아는 것과 비해보면 소련이나 중국 문화는 정말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 것 때문에 처음에 서울에 와서 저도 여기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문화적인 대화는 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중국에서 그곳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편했었다고 생각될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오랫동안 사회주의를 했고 지금도 명색은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겪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통일 이후에도 남과 북의 화합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과 북이 언어만 같다고 바로 얼싸안고 쉽게 합쳐지는 것은 아니겠더라고요. 남쪽에선 통일 이후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자본주의 국가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논의가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경제력이 백 배 넘게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를 어떻게 하면 빨리 극복할까 이런 논의는 정말 많이 되고 모든 사람들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경제문제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문화적 동질감을 어떻게 빨리 이뤄낼까 하는 문제도 통일 이후에 심각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똑같이 조선말은 하는데 서로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감정적 골이 깊어질 수가 있고 지역 간 싸움으로까지 발전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경제적으론 크게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 말이 잘 통하면 상대를 더 잘 이해하면서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는 제일 손쉬운 방법은 남과 북이 같은 TV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쪽 TV는 통로도 한두 개뿐이고 재미도 없고 하니 북쪽 사람들이 남쪽 TV를 많이 보는 게 중요하겠죠. 작년 12월 30일에 KT라는 한국의 대표적 통신기업이 위성 방송을 쏘는 인공위성을 쏴 올렸는데 여기서 나오는 전파는 북쪽 어느 곳에서나 잡힌답니다.
TV 수신방식이 북쪽은 PAL 방식이고, 남쪽은 NTSC 방식으로 다르긴 하지만 북조선의 대다수 TV가 두 가지 방식의 수신이 가능한 외국산이기 때문에 수신 안테나만 구입해 몰래 감추면 한국 TV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북에 GPS도 많이 퍼져있을 정도니 위성 안테나도 몰래 팔리긴 하겠지만 그보단 북조선 매 가정에 있는 일반 실외 안테나에서 잡힐 수 있는 신호를 직접 위성으로 내쏘면 어떨까요.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저도 상상이 잘 안되는데 혹시 북에서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는 남과 북이 한 위성에서 내쏘는 같은 방송을 보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그런 날이 통일이 되기 전에 먼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