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신용불량자와 신용불량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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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년도부터 근로자들의 월급이 좀 오른다는 소식이 여기 남쪽까지 전해집니다. 그래봤자 지금 월급으로 쌀 네 키로도 못사는데 올라봤자 대여섯 키로나 살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도 돈 가치가 자고 나면 떨어지니 월급 좀 더 준다고 크게 좋아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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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는 북한 미사일부대. AFP PHOTO

작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인플레가 제일 심한 나라는 짐바브웨였습니다. 거긴 닭알 1개가 무려 350억 짐바브웨 딸라나 했습니다. 빵 하나 사려면 돈을 마대에 메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짐바브웨 정부가 작년에 자국 화폐를 아예 사용 금지시키고 딸라와 유로화만 쓰게 했더니 신기하게도 인플레가 싹 사라졌습니다.

북조선도 돈 있는 사람은 내화를 믿지 못해 딸라나 중국 돈만 갖고 쓰지 않습니까. 외국돈 가치는 크게 변하지 않으니깐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외화를 사용할 순 없으니 쌀 장사꾼처럼 배낭에 조선돈을 메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죠. 제가 북에 있던 10년 전에 벌써 큰 장사꾼들은 조선돈은 가치는 없고 부피만 너무 크니깐 저울로 돈뭉치를 달아서 거래했습니다.

사방에 도둑과 꽃제비가 득실득실한데 돈을 메고 다니면 언제 쓰리 맞을지 몰라 몹시 두렵죠. 그렇다고 20년 전에 벌써 기능이 마비된 은행에서 송금할 수도 없습니다. 갖고 다닐 돈이 좀 적으면 허리에 돈띠를 두르기도 하고 양말 안에 숨기기도 하고 팬티 안에 주머니를 만들어 넣기도 하고 그리고 다닙니다. 그러니 돈이 너무 빨리 해지고 그러면 다시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이고, 그렇게 누더기가 된 돈도 수시로 제대로 있나 더듬어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한국에 와보니 여긴 참 딴 세상입니다. 일단 큰돈을 갖고 다닐 일이 거의 없습니다. 돈을 보낼 일이 있으면 곧바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이용해 돈을 보내면 됩니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에 돈을 보내겠다 이러면 1분이면 가능합니다. 해외에 보내는 것도 시간이 그리 많이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니 너무 편하긴 한데 대신 눈앞에 돈뭉치들을 쌓아놓고 흐뭇해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월급도 돈 봉투에 넣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통장에 입금되니 숫자만 딱 찍히고, 돈을 보내고 받고 하는 것도 통장에 찍힌 숫자가 줄었다 늘었다 하니 결국 숫자만 움직이지 돈이 오간다는 실감은 잘 나지 않습니다.

여기선 평소에 지갑에 돈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고 대체로는 신용카드라는 것을 갖고 다닙니다. 제가 북에 있을 때 이 신용카드라는 것이 잘 이해 안돼서 정말 머리 갸웃갸웃 했던 적도 있습니다. 신용카드는 주패장보다 좀 작은 수지카드인데 여기에 개인 통장번호와 같은 정보가 보이지 않게 들어있습니다. 밥을 먹고, 물건을 사고, 지하철을 타고, 아무튼 돈 쓸 일이 있으면 이 신용카드를 계산기계에 대면 자기가 쓴 돈이 카드 안에 보이지 않게 기록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 달 동안 쓴 돈을 다 기록했다가 한달에 한번씩 개인 통장에서 돈을 뽑아갑니다. 내가 한달 동안 신용카드로 100만원을 썼다 이러면 약속한 날에 통장에서 신용카드 회사로 100만원이 자동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죠. 돈 다발을 갖고 다니지 않을 수 있으니 상당히 편하긴 합니다.

우리나라 신용카드를 외국에 갖고 나가서도 쓸 수도 있는데 제가 외국에서 돈을 쓰면 신기하게도 그 액수만큼 알아서 한국의 제 통장에서 빠져 나갑니다. 신용카드를 분실하는 경우엔 카드회사에 연락을 하면 다른 사람은 쓰지 못합니다.

내가 통장에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카드로 긁었다 이러면 신용불량자라는 것이 됩니다. 신용불량자는 한마디로 “이 사람은 자기가 돈을 못 낼 것을 알면서도 양심 없이 돈을 먼저 써버린 신용이 없는 믿지 못할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선 신용불량자로 찍히면 상당히 살기가 괴롭습니다. 이 사람하고 다들 거래하려 하지 않으니 최대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선 신용이 생명이라고 합니다. 하긴 북조선도 마찬가지죠. 남의 돈을 꾸고 갚질 않으면 손가락질 받고 다신 돈을 빌릴 수도 없죠.

신용불량자는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에도 신용불량 국가란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신용불량국가가 바로 북조선입니다. 북에 돈을 차관형태로 빌려줬던 옛 동유럽 나라들이 이를 제대로 다 돌려받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해외 기업인들이 좀 투자를 했다하면 당 간부, 보위부, 보안부 이런 권력기관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이 구실 저 구실 뜯어내다보니 북에 들어가서 돈 벌었단 사업가가 없습니다.

나라가 신용이 불량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나라 사람들이 보는 겁니다. 북에선 남조선이 외세의 자본을 빌려다 살아간다고 비판하죠. 사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무려 3000억 달러나 됩니다. 깔고 있는 외화 돈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다른 나라에 빌려줄 때도 있고 빌려 쓸 때도 있습니다.

사실 남의 돈을 잘 꾸려 해도 자기 재산도 좀 있어야 하고 신용도 확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동네에서 돈 꿔보십시오. 갚지 못할 사람에겐 빌려주지 않죠. 북쪽은 돈을 꿔서라도 나라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럴 능력조차 안 되면서 10년 넘게 강성대국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선전하니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북조선이 잘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세계에 신용이 있는 믿을 수 있는 국가라는 것부터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