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유난히 덥습니다. 서울에선 5월부터 반팔을 입고 다니는데, 왜 이리 덥냐 했더니 올해 5월이 지구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5월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에 따르면 5월의 평균 기온은 15.54도로 20세기 평균보다 0.74도나 높았다고 합니다. 기온 1도차에 따라 지구 어느 곳에선 생물들이 죽고 살고 하는데 0.74도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5월에 기온이 특히 높았던 나라 5개 중에 한국이 포함됐습니다. 아마 6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벌써 저는 집에서 선풍기를 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한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6월은 2014년 6월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7년 6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남쪽에선 전 국민이 민주화를 위한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을 끝내버렸습니다. 물론 그 독재는 북한과 비교되지도 않는 독재이지만 말입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땀을 흘리던 그때, 최루탄 연기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백골단의 구둣발에 짓밟혔을 그때가 한국에선 가장 뜨거운 열정의 6월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당시 북한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노동신문과 방송을 통해 흥분 속에 보았던 6월 항쟁의 사진과 화면들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여러분 누구나 다 아는 박종철 학생이 경찰에서 고문 받다가 숨졌던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자 언론에 “조사 중에 책상을 툭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때 한국 언론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시 주재하고 있으면서 모든 기사를 감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죽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때 제일 활약했던 언론이 지금 제가 일하는 동아일보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박종철 학생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내용을 취재한 뒤, 다른 신문들이 정보기관의 위협과 압력에 주춤하고 있는 와중에도 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습니다. 박종철 학생 검안의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물고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과감하게 보도했고 이어 ‘고문 추방 캠페인 시리즈’까지 과감하게 냈습니다.
그때가 동아일보의 전성기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거리에서 구하기도 어려웠고, 동아일보를 감시하고 막아야 할 수사정보기관원들까지 나중에 동아일보에 전화를 걸어 기자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거리에 나가면 시위대가 동아일보 기자들을 보고 환호했고, 이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동아일보의 활약이 뛰어나다보니 북한에서 당시 6월 항쟁을 보도한 기사도 거의 다 동아일보를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두환 괴뢰정권이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는 것이죠. 그때 저는 동아일보의 이름을 확실히 머릿속에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16년 뒤인 2003년 북한을 탈북해 온 저는 동아일보 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입사원서를 냈고, 시험을 통과해 기자가 됐습니다.
제가 입사하니 6월 항쟁 때 활약했던 그 용감한 기자들이 바로 제 선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웠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박종철 고문 기사로 동아일보는 그해 한국기자상을 받았습니다. 그 한국기자상을 받았던 선배들이 지금도 동아일보의 논설주간과 전무 등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때 동아일보의 활약은 ‘박종철 고문살인 범국민대회’를 이끌어냈고 그해 6월 9일 시위에 나섰던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계기로 10일부터 온 국민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연세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후 시위는 전국 도시들로 번졌고, 학생도, 회사원도, 주부도 시위대열에 합세했습니다. 결국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뽑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내일이 그 6월 29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음모와 술수로 국회의원들을 조종해서 만들어지던 대통령이 그때부터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6월 항쟁은 8.15해방과 4.19혁명에 이어 한국의 제3의 해방의 날로 꼽히기도 합니다. 지금도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당시의 기억을 흥분 속에서 회상합니다. 그때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민주주의 만세를 목청껏 부르던 대학생들이 기자가 되어 지금 저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북한에서도 유명한 신문입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1920년대에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고,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동아일보를 제일 많이 인용했습니다. 4.19혁명, 백지광고사태,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동아일보는 한국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5년 넘게 방송을 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자기가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선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입사했던 이후 10여년간은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습니다. 민주화된 남쪽 사회는 더는 목숨을 내거는 기자가 필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독재정권 때는 기자가 그냥 사실만 보도해도 박수를 받았지만, 이제는 전문성이 있어야 인정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여기에 과학기술 발달로 이제는 신문 대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시대가 와 많은 신문사들이 적자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감한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시대가 제게 기회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북한에서 27년 전의 남쪽처럼, 전 인민이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떠서는 그런 순간이 만약에 온다면 저도 그 순간을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그 희망과 꿈을 간직하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