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남쪽에서 추석을 지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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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추석 연휴에 접어들었는데, 북에선 이번 추석에 며칠 쉬십니까. 제가 아직 그 정보는 얻어듣지 못했습니다. 여기 남쪽에선 토요일부터 시작해 나흘 동안 휴식합니다. 원래 남쪽에선 추석을 해마다 무조건 3일 동안 쉬는데 이번 추석은 앞에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끼어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야 추석이 참 큰 명절임을 알았습니다. 북에선 태양절이니 2월16일이니, 당창건 기념일이니 하는 정치적 명절을 늘 중요시하다보니 추석 같은 민족 전통의 명절은 뒷전이 아니고 뭡니까. 여기선 추석이면 모두 고향에 내려가 일가친척들이 모여앉아 오랜만에 인사도 하고 그동안 회포도 풀고 그럽니다. 물론 저처럼 북에서 온 탈북자들은 고향에 갈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집에서 보냅니다. 제가 타향살이를 해보니 처음엔 낯선 곳에 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어 잘 모르겠는데, 먹고 살만하니 해가 갈수록 잊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보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 고향인 것 같습니다.

추석날에 온 가족들이 모여 앉으니 어떻습니까. 우선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하겠죠. 또 오랜만에 친척끼리 만났으니 서로 인사하면서 주고받는 선물도 필요하겠죠. 이것 다 어디가 삽니까. 시장하고 상점가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추석 때면 여기 시장과 상점들은 대목을 맞습니다. 장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아지니 평소보다 가격도 오릅니다. 그래서 여기 남쪽에선 각 지방 정부들은 추석 때마다 빠지지 않고 추석 연휴 특별대책이라는 것을 실시합니다.

지방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도 올해 '5대 특별 종합대책'이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다섯 가지가 뭔가 하니 우선 교통 특별대책입니다. 집에 갔다왔다하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몰리니 길이 막히지 않게 관리하자 이겁니다. 둘째는 물가 특별대책입니다. 폭등하기 쉬운 가격 좀 잡겠다는 것입니다. 추석이면 제상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에서도 조상 묘에 그래도 좋은 음식 올리겠다고 한 달 전부터 고기 사서 말리고, 쌀을 사서 보관하고, 채소 구해오고 하면서 정성을 많이 들입니다. 여기는 워낙 뭐가 풍족하다보니 북쪽만큼 정성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냥 돈 들고 시장가면 필요한 것 다 사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격이 해마다 오른다는 것이죠.

어디 조사를 보니 4인 가족이 추석 제사상 차리는 비용이 지난해엔 평균 180딸라 들었는데 올해는 200딸라가 넘는다고 하더군요. 올해는 7월 달에 남쪽에 비가 워낙 많이 왔습니다. 1년 강수량에 맞먹는 비가 7월 한 달 다 쏟아져 내렸는데 이건 뭐 기상관측 기록이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비가 와서 사과, 배와 같은 제사상에 올릴 과일과 채소들이 몽땅 비싸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 남쪽은 워낙 온실이 발달돼 있고, 부족하면 중국에서 바로바로 사올 수 있어 농사 다 망쳐도 가격이 그렇게 천정부지로 오르진 않습니다. 북쪽 같으면 과일이 망하면 구할 데나 있습니까. 없이 그냥 제사 하는 거죠.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여기 물가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사과나 배, 복숭아는 한 개가 보통 1딸라 정도합니다. 좋은 것은 1개가 세 딸라 넘습니다. 돼지고기는 한 키로에 20딸라 넘고, 소고기는 30딸라 넘습니다. 쌀은 한 키로에 2딸라 정도고 강냉이는 먹지 않으니 아예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북에선 쌀 한 키로면 돼지고기 세 키로에 맞먹는데 여긴 쌀 한 키로면 돼지고기 열 키로에 맞먹습니다. 고기 사먹기 그만큼 힘든 것이 아니고 쌀값이 워낙 눅어서 그럽니다. 정부에서 하는 대책이라는 것이 시장가서 가격 올리는 상인들 조사하고 물건 실어오는 차량 기름값 좀 보조해주고 하는 것들입니다.

추석이면 제사상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선물도 오가겠죠. 여긴 추석에 주고받는 선물이 대충 정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과일이나 농수산물을 포장해 담은 선물이나 비누, 치약, 샴푸 이러한 것들을 담은 생활용품 선물, 인삼, 꿀처럼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강식품을 담은 선물이 오갑니다. 또 상품권이라는 것도 선물로 잘 오가는데, 이건 돈을 직접 주기는 그렇고 하니 상품교환권을 주는 것입니다.

농수산물 선물, 거 뭐 그리 비싸겠어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비쌉니다. 남쪽에서 인기 있는 굴비 선물 같은 것은 70딸라 정도 합니다. 굴비란 것이 북에서 말하는 서해산 조기 말린 것인데, 20마리에 70딸라면 북에서 들으면 눈이 돌아갈 일이죠.

교통과 물가 잡기, 이런 대책이 제일 핵심이고 그 나머지는 추석에 쉬는 병원이 많으니 환자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이런 것, 그리고 재난과 사고를 막자 하는 것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자본주의 사회가 비정하다고 교육받았죠. 하지만 사회주의라고 하는 북조선보다 훨씬 인간적입니다. 정부에서 나서서 가난한 사람들 신경 써 챙겨주고 아픈 사람 생길세라 병원도 돌아가면서 열게 하고 그러잖습니까.

여긴 선거로 집권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남쪽엔 추석민심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추석에 가족이 모여 앉으면 뭐하겠습니까. 한나라당이 낫냐, 민주당이 낫냐 하면서 논쟁하는 거죠. 추석 때 잘 보여야지 이때 찍히면 선거 때 표를 얻지 못합니다. 추석 때면 "아, 내가 정치인들이 인민의 눈치를 보는 나라에 와서 사는구나"하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제 배 불리기만 정신없는 북조선 간부들도 인민의 눈치를 조금이나마 보는 날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고단한 삶,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이번 추석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