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에는 서울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 실감납니다. 아직 영하까진 내려가지 않았지만 새벽 기온이 1도부터 5도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매우 춥습니다. 한국에선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이 가장 추운 지역으로 꼽히는데 여긴 10월 중순에 벌써 얼음이 관측됐답니다. 남쪽이 이러면 북쪽은 벌써 두꺼운 동복을 입고 다니겠네요. 이렇게 10월 말에 추위가 닥쳐오면 이제는 김장철에 들어섰다는 신호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북에 살 땐 항상 손을 호호 불면서 김치를 담그었습니다.
김치, 이건 북에서 그냥 단순한 반찬이 아니고 반년의 부식물이고 식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전투라는 말을 붙여 김장전투라고 합니다. 진짜로 배추, 무우 확보하는 것이 전쟁이긴 하죠. 가을이면 힘 있는 자들은 농장 밭을 통째로 넘겨받아 김장배추를 확보합니다. 당기관이나 보위부, 안전부, 검찰소 이런 권력기관들이 농장에 와서 밭을 둘러보고 제일 농사가 잘 된 포전을 떡하니 차지하면 그다음 힘 있는 기관들이 그보다 좀 못된 포전을 차지하고, 군대가 또 차지하고 이러면 정작 농사지은 농민은 좋은 배추 못 가져갑니다.
배추밭을 차지해도 또 실어가는 것도 능력이 돼야 대형차를 동원해 듬뿍 실어가지 힘이 없으면 구루마로 실어 날라야 하죠. 제가 김일성대 다닐 때 대학이 배추 받는 농장이 같은 대성구역에 있었지만 걸어서 15리는 가야 합니다. 오전 수업이 끝난 뒤 농장에 걸어가서 배추 몇 포기씩 등에 메고 다시 걸어 대학에 날라 오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1만 명 넘는 교직원 학생들이 배추 몇 포기씩 메고 길에 쭉 늘어서 걸어오는 광경은 정말 볼만 했습니다. 그리고 고추는 당연히 없어서 백김치였죠. 그래도 늘 배고프니 백김치도 맛있기만 했습니다. 평양김치공장에서 만드는 김치는 백김치긴 했지만 맛이 좋아서 특권층만 공급받았습니다. 아직 저는 그보다 맛있는 김치를 먹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공장 김치를 누가 작은 바케츠에 가득 담아왔는데 기숙사생 네 명이 밥도 없이 김치만 배 터지게 다 먹어치운 기억도 있고요.
겨우내 김치밖에 반찬이 없으니 김치를 담그면 보통 1인당 배추 200키로, 무우는 50키로는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이듬해 4월까지 먹을 수 있죠. 물론 그것도 힘 있고 돈 있는 가정이나 그렇게 담그긴 하지만 아무튼 4인 가족이면 한 겨울에 보통 배추 무를 1톤은 먹어 치우는 거죠. 그렇게 김치 담궈 먹었다면 여기 남쪽 젊은 사람들은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서울은 4인 가족이라고 해도 배추 200키로 담그는 집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실정임을 감안할 때 여기 학생들에게 북에선 1톤은 어렵지 않게 먹는다면 북한 사람들은 무슨 대식가인가 놀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는 쌀도 1년에 80키로도 소비하지 않습니다. 간식이 많으니 그렇죠. 김치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맛있는 반찬이 많으니 김치 소비가 적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아침엔 거의 밥을 안 먹고 회사에 나와서 식당에서 점심, 저녁 대체로 먹는데 거기선 또 김치를 주니 집에 김치가 있을 필요가 없죠.
또 하나 이유는 여기 남쪽은 가정마다 김치만 전용으로 보관하는 김치냉장고라는 것이 있어서 딱 겨울에 김치를 담글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사실 오늘 김치냉장고 이야기를 하려고 김치 이야기 꺼냈습니다. 북에선 통배추가 가을에만 나오는데 여기는 통배추가 1년 사시사철 나옵니다. 물론 여기도 11월, 12월이 김장철인 것은 맞지만 여름에도 김치 담글 수 있습니다. 북에선 김치 만들면 창고에 몇 독 파묻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긴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김치를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북한처럼 아파트 아래에 개인 창고를 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개인 창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난방이 온수난방이니 석탄화목도 저장할 필요도 없고 김치도 냉장고가 있으니 밖에 보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치냉장고에 온도를 설정해 딱 놓으면 자기가 먹고 싶은 날짜에 맞추어 김치가 숙성됩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의 온도는 김치 보관에 알맞게 항상 딱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래 갑니다. 저도 얼마 전에 누가 작년 12월에 담근 김치를 먹어보라고 가져와 먹었는데 1년 된 김치가 너무 맛있는 겁니다. 북에선 창고에 내놓으면 날씨가 영하 20도로 내려가고 이러면 김치가 다 얼어버리고 이런 일이 많죠. 여긴 그런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죽을 둥 살 둥 김치 담그지 않고 적당히 만들어 먹은 뒤 또 만들어 냉장고에 넣으면 되죠.
집에 김치냉장고가 있어 좋은 점은 도둑질 맞을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야 설사 밖에 내놓아도 김치를 훔쳐가는 사람은 없지만 북에선 겨울에 도둑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옛날 저희 집도 김치를 여러 번 도둑질 맞았습니다. 주로 군인들이 다 훔쳐가죠.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원래 도둑질은 못하는 성격인데, 대학 때 교도대에 나가서 김치 도둑질 한 번 했습니다. 아마 남의 것 훔쳐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분대장이 앞장서 “날 따라 앞으로” 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진지 아래 사택에 내려가서 건장한 남자 4명이 주인이 나오지 못하게 문을 어깨로 밀고 있고, 두 명이 들어가 한 바케츠 퍼왔습니다. 우리 중대에 김정은 친척도 있고, 갑부 아들도, 장관급 고위간부 아들도 있었지만 군복 입혀 놓고 명령 내리니 사택 가서 김치 잘만 훔쳐옵디다.
아무튼 김치는 없어도 큰일이고, 있어도 지키느라 큰일입니다. 북에도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있어도 전기가 없는데 어떻게 씁니까. 이번 가을엔 여러분께서 운이 좋아 좋은 배추 무우 풍족히 장만하시고, 늦봄까지 김치를 잃어버리지 않게 되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