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은 북에서 가장 바쁜 김장철이라 모두들 이 방송을 듣는 시간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방송 청취율을 북에 들어가 조사해볼 순 없지만 아마 11월 초중반은 가장 청취율이 안 나올 때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북에선 워낙 여기저기에 전투란 말을 갖다 붙여서 김장철도 김장전투기간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주민들에게 있어 진짜 전투는 김장전투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치를 얼마나 담그느냐에 따라 반년 식량이 결정되기 때문이죠. 워낙 겨울에 먹을 반찬거리가 없으니 김치라도 없으면 손가락 빨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북에 살 때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 1인당 김치 깍두기용 다 합쳐서 채소 200㎏는 확보해야 했습니다. 4인 가족이면 800㎏을 김장용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농민도 배추 무를 이정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농장원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수확할 때쯤에 당 기관과 보위부 안전부와 같은 권력기관들이 와서 밭을 쭉 돌아보고 농사가 가장 잘 된 배추밭과 무밭을 자기들 몫으로 찜하고 경비를 세웠습니다. 두 번째로 잘된 밭은 군인들이 들어와 선군정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타고 앉았습니다. 제가 북에 있을 때는 그랬습니다. 농사가 잘 안된 밭은 농민들과 노동자 몫이었습니다.
그때 사회주의 평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저는 분노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에서 양반 상놈의 신분상 숙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속 터놓기 힘드니 다른 사람들도 속으론 분노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노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고 나만 손해기 때문에 저부터도 겉으론 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도 농민이 짓고, 수확도 농민이 하는데, 좋은 건 다 빼앗기니 이게 노예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나니 농민들도 굶주리기 시작했고, 배가 고프니까 그제야 반항심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다 빼앗길 것 뭐하려 열심히 짓나 이런 생각이니까 나중에 당 간부들이 와서 좋은 것 가로타고 앉으려고 해도 빼앗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기간에 비료도 공급 안 되다 보니 어느 밭이나 다 시들시들한 거죠.
그러니까 간부들이 또 꾀를 냈지요. 아예 농사 시작되기 전에 지력이 제일 좋은 땅을 자기 기관 밭이라고 찜을 한 것이죠. 그리고 권력으로 얻은 비료를 자기 땅에만 갖다가 공급합니다. 군인들도 아예 땅을 미리 할당받아서 가을에 부대가 가져갈 배추무 농사를 자기들 스스로 짓게 했습니다. 그러면 농민들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쭉정이 땅을 받고 비료를 사올 돈도 없으니 더욱 못살게 된 거죠.
그래도 농민은 좀 낫습니다. 아무리 권력 순으로 땅을 차지해도 밭이 집 앞에 있으니 밤에 몰래 훔쳐서라도 배추를 숨겨놓을 순 있지 않겠습니까. 농촌에서 먼 곳에 있는 노동자들은 100㎏도 차례지지 않았고, 50㎏나 80㎏ 받아도 감지덕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권력기관이 배추를 수확해 간 자리엔 곧바로 보자기를 두르고, 배낭을 멘 이삭주이꾼들이 새하얗게 달라붙습니다. 그들이 흘린 배추 잎사귀 하나라도 더 주어가려고 말입니다. 이삭주이는 배추 밭이나 무 밭에만 달라붙는 것이 아니고 가을걷이가 끝난 북한 논과 밭 어디 가나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해봤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정말 벌판에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농장원들은 열심히 수확해 다 국가에 빼앗기기 보단 이런 사람들 가져가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주인 의식이 전혀 없어서인지 가을걷이도 대충 대충했습니다. 이삭주이꾼들이 휩쓸고 지나가야 진정한 가을걷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탈북해 중국에 들어올 때 일이었습니다. 그때가 12월초쯤 됐는데 중국땅에 들어와서 큰길로 가다간 변방대 순찰차에 잡힐까봐 산 아래 밭을 타고 안쪽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긴장돼서 몰랐지만 한참 걷다보니 밝은 달빛에 훤하게 허리를 드러낸 밭두렁을 내려다보는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게 콩밭이었는데 고랑에 콩꼬투리들이 엄청나게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아마 그걸 북한 이삭주이꾼들이 보면 생전 처음 보는 노다지 밭이라고 환성 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은 개인농인지라 분명 이것도 개인 밭이겠는데, 그냥 큰 것만 걷어가도 충분하고 땅에 떨어진 꼬투리는 아예 귀찮아서 그대로 버려둔 것입니다. 북중 국경은 산악지대라 짐승들도 많을 텐데 짐승도 먹을 게 너무 많아 다 챙겨가기 귀찮아서 안 가져간 것 같습니다. 처음엔 히야~히야~ 감탄하다가 갑자기 속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왜 이리도 다른 땅이 됐는지. 두만강을 넘은지 몇 시간 만에 화룡의 어느 골짜기에서 북한땅을 건너다보면서 저는 죽더라도 저 땅에 내 청춘을 묻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이래저래 놀랐던 일은 많았습니다. 한국은 무우를 우자는 빼고 그냥 무라고 읽는데 언젠가 티비를 보다가 무시래기를 만든다면서 무 줄기만 잘라 말리고, 무는 그냥 땅속에서 캐지 않고 썩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래기용이라 잎은 무성하지만 무는 작아서 팔리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제가 보건대 그 정도면 북한 사람들은 최상급이라고 할 텐데 말입니다. 한국에 산지 1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자꾸 농촌의 아까운 것들을 보면 북한의 이삭주이꾼들이 맨 먼저 생각나니, 저는 아무래도 몸만 북한을 떠났을 뿐이고 마음 한구석은 북에 남아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기야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님의 김치 깍두기 맛이야 죽을 때까지 제 마음속에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