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역사의 현장에서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지난달 26일 저녁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지난달 26일 저녁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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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새는 북쪽에서 핵실험을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시절입니다. 하도 남쪽에서 커다란 사건들이 연일 이어 터지니, 제 코가 석자인지라 북한 소식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쪽이 소란스러운 이유는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최순실 관련 파문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도 북한 매체들이 매일같이 떠들어대니 박근혜와 최순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아실 겁니다.

솔직히 이건 입이 열개라도 변명하기 어려운 정말 부끄러운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남쪽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기자는 저에게 “북한 보기 창피해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뤘고 경제대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나라에서 대통령과 친한 일개 민간인 여인이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삼류 후진국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지금 이런 사건이 벌어진 배경을 조금 더 설명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20대에 어머니를 북한 공작원의 총에 잃고, 아버지도 4년 뒤 김재규의 총에 잃었습니다. 그러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박정희에게 그렇게 아첨하던 사람들이 얼굴을 싹 바꾸어 박근혜를 유폐시키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니 정신적 충격이 참 컸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겠죠. 그 과정에 최순실이란 여인이 거의 40년 가까이 인간 박근혜의 옆을 지켰고, 국회의원 선거 때나 국회의원이 된 뒤에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여전히 이 우정이 이어졌습니다. 여기까진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 최순실이란 여인과 그의 아버지가 참 사악해서 박근혜를 이용해 일가가 수억 달러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자기 지시를 받는 인물들을 박근혜의 심복 보좌관으로 임명해서 국정을 좌우했습니다. 그 사리사욕이 과해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기가 친한 인간들을 정부 인사로 임명하고, 국가 재정을 빼돌려 자기가 챙겨 먹었습니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일어난 전말입니다. 국민들은 그간 이런 일들을 까맣게 몰랐죠. 워낙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청와대 안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영원한 비밀은 없나 봅니다. 언론 보도로 그간 벌어진 사건들이 양파처럼 하나 둘 벗겨지면서 결국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박근혜가 최순실을 끼고 돌면서 감싸주었고, 심지어 불법행위에 방조까지 했다는 것에 분노합니다.

국민들은 광장에 달려 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제가 광화문에서 일하고 있는데, 지금 이 시간도 밖에서 “박근혜는 당장 퇴진하라”는 구호와 함께 거대한 시위의 물결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요새 날씨가 얼마나 춥습니까. 그러나 시위대는 추위도 모릅니다. 아마 이번 사건은 한국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분기점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겁니다. 저는 지금 중요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탄핵 시위를 벌써 두 번 보고 있습니다. 기자가 된지 좀 지나 2004년 봄에 노무현 탄핵 반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때는 정치권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니 국민이 거리에 나와 탄핵을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여의도에서 취재를 했는데, 당시엔 보도블럭도 날아다니고 분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됐을 때니까 얼마전 죽음도 헤치고 온 나인데 그깟 남쪽 시위가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겠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돌이 날아다니는 현장에 뛰어들었다 정말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이거 남쪽 사람들이 정말 무섭네. 시위 정말 살벌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탄핵 반대가 아닌 탄핵하라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위는 양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지난 주말에는 180만 명이 광화문 거리에 나왔지만 연행된 사람도, 부상당한 사람도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평화적 시위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즐기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을 하야시킬 때는 경찰이 총을 쏴서 186명이 사망했습니다. 2004년엔 부상자와 연행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엔 정말 평화로운 시위가 벌어집니다. 외국서도 놀랍니다. 100만 명이 나왔는데 저렇게 질서 정연할 수 있을까, 폭력 하나 벌어지지 않냐고 말입니다. 깨끗하기로 소문난 일본도 광화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광장에 쓰레기 하나 없다고 감탄합니다.

박근혜 때문에 한국이 세상 앞에 망신을 했지만, 대신 국민이 나서서 대한민국이 후진국이 아닌 대단한 나라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꼭 말씀드릴 점은 대한민국은 지금 국민을 이기는 통치자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힘에 밀려 이번 주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물러날지는 국회가 결정해 달라 했습니다. 물론 한국은 국민의 의식과 경제 수준에 맞지 않게 정치가 워낙 후져서 국회에서 또 말싸움을 벌이면 언제 결과가 나올지 모르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검사도 수용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잘못을 특별 검찰이 파헤치도록 수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이 드러나면 아무리 대통령도 감옥에 가야 합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은 잠시 부끄럽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현직 대통령도 잘못하면 감옥에 보내는 나라라는 사실을 북한 인민에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입니다. 광화문에서 시위대를 내려다보며 생각합니다. 북한 인민도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은 물러나라” “김정은 감옥가라”라고 목청껏 외치는 날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