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진행되는 청소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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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퇴근길이었지만 이어 지는 찜통더위로 이마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립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유별나게 땀을 많이 흘리는 저는 땀을 식히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습니다. 전철역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청소차가 천천히 지나갑니다. 청소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택시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아스팔트에 쌓인 먼지를 빨아들이며 천천히 지나가는 청소차를 보면서 또다시 지나간 고향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이곳 남한생활도 10년이 훨씬 지나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도 특히 도로 청소와 아파트 단지 청소를 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네요. 평양시 인민반장이었던 저는 새벽 5시가 되면 주민들에게 담당 청소를 하자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깨웠습니다. 특히 3.4월이 시작 되면서 도로 담당 청소 구역을 만들어 도급제 청소를 진행 했습니다.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빗자루로 쓸고 닦고 하는 청소가 아닙니다.

도로 연석은 찰떡을 굴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걸레로 비누와 물로 자기가 사는 집 방안처럼 깨끗하게 닦고 검열을 받아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도로를 관리 하는 미화사업소가 있지만도 북한 당국은 인민반 별로 또 구간별로 담당을 만들어 주고 매일 아침 마다 청소를 진행하게 합니다.

그날도 저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빨리 청소를 나오라고 독촉 했습니다. 결혼 한지 이제 겨우 1년도 안된 신혼부부가 있었거든요. 반장 엄마에게 한 가지 제기 할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순간 무슨 인민반장 사업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나 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하는 말이 신혼이기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가 어려우니 조금만 봐달라고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저 역시 한 가지 합의 건을 내 놓았습니다. 도로 연석을 닦으려면 비누가 필요하니 비누를 보장하는 것과 함께 오물장 처리에 필요한 휘발유와 디젤유를 구입해 내라고 권했습니다. 신랑이 군부대 운전기사라 그는 군말 없이 오케이 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곳 남조선 대표단이 대동강 역 주변을 지나 통일 거리로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밤 12시에 주민들을 비상소집 시켜 양각 다리와 대동강 역 주변 도로를 비눗물로 깨끗하게 쓸고 닦고 있는데 한 주민이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 직장에서 고생한 사람을 잠 못 자고 이게 무슨 고생인가고 농담반 진담반 섞인 불평을 했거든요. 그 주민은 얼마 안 있어 농촌 지원 명단에 들어 지방으로 추방 되었습니다.

사실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거든요. 회사 직원들은 이삿짐을 싸고 가족들은 울면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을 잘 관리 하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짠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자유가 없고 항상 조심해야 되고 누구의 감시와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북한 사회, 북한 주민들을 생각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내 고향 평양에도 청소차가 있긴 합니다. 하루에 한두 번은 청소차가 도로에 물도 뿌리고 청소도 합니다. 하지만도 인민반 마다 담당제를 만들어 놓고 주민들이 총 동원되어 청소를 하도록 강한 통제를 하거든요. 평양시에도 청소차가 있어 굳이 주민들에게 강하게 요구하지 않아도 될 일이건만, 지금 생각 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눈이 내려도 눈치우려 나오라는 말 없고 도로 청소 하라는 말 없고 아파트 단지 청소 하라는 말 없고 즉 꾸리기라는 말과 위생 검열 이라는 말과 단어를 인제는 다 잊어버린 듯 하네요. 퇴근길 우연히 도로 청소차를 보면서 지나간 고향에서의 추억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