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평양에서 쫓아내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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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함께 성동장애인복지관을 다녀왔습니다. 수녀님을 만나 복지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 들렸습니다. 커피숍 역시 복지관에서 운영하고 있거든요. 커피를 주문하려고 하는 순간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연예인 못지않게 멋있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 카드결제도 된다고 합니다.

많이 미안 하지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듣고서야 아! "카드 결제도 된다"고 하는 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었습니다. 키가 훨씬 큰 그 젊은 청년에게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청년뿐만 아니라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분도 있었는데 커피 가르치는 담당자의 가르침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수녀님은 우리에게 얘기 합니다. 그들은 언어 장애인인데 커피숍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근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하네요. 그 청년은 언어 장애가 있다 보니 말을 잘 못합니다. 그냥 "안녕하세요." "커피, 카드 결제도 됩니다." 이 말만 겨우 합니다. 제가 처음 잘 알아듣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됐다고 하는 수녀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자리에 세우기까지 복지관 일꾼들과 봉사자들의 얼마나 많은 노고가 숨어 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친부모도 못하는 일을 말없이 친 가족처럼 가르치고 돌봐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니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복지관을 방문하면서 우리 장애인들이 사회의 한 자리에 당당하게 서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합니다.

사실 친구는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0살 나던 해 갑자기 부모님을 따라 평안남도 평성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네요. 한 살 두 살 철이 들면서 고지식한 우리 부모님이 무슨 일을 잘못해 이렇게 지방으로 추방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의문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물음에 답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때로는 부모님에게 말대꾸를 해서 상처를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산에서 나무를 해 등짐을 지고 집으로 오던 벙어리오빠가 잘 듣지 못한 탓으로 뜨락또르에 부딪쳐 다쳤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벙어리오빠는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는 친구는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때서야 나이 많은 부모님이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언제야 이 세상이 망하는 날이 오겠는지. 이 세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 오빠는 저렇게 죽지 않았을 것인데…" 이 말을 들으면서야 장애가 있는 벙어리오빠 때문에 평성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부모님의 속을 많이 태운 불효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후회 했다고 합니다.

친구의 가슴 아픈 얘기만이 아니라 이것이 북한사회의 현실입니다. 우리 인민반에도 그와 같은 주민이 있었거든요.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딸이 엄마 아빠라는 말은 하는데 다른 말은 전혀 할 수 없는 벙어리였습니다. 행사 기간만 되면 담당 주재원은 인민반에 찾아와 그 집 딸을 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통제합니다. 해마다 통제가 심하더니 딸애가 10살 나던 해인 89년 13차 세계축전을 앞두고는 아예 어느 지방으로 소개시켜 버렸습니다.

북한 사회에서, 특히 평양시에서 소개라는 것은 지방으로 추방된다는 말이거든요. 이삿짐을 싸서 대동강역으로 가던 날 그의 부모님은 인민반장인 저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함께 살던 그들이 혹시 이곳 한국에 오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들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이곳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서울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사회의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참다운 삶을 살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