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촌에서 겪은 남북분단의 아픔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북한 개성 봉동리 일대 마을(위)과 남한 통일촌 마을(아래)이 보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북한 개성 봉동리 일대 마을(위)과 남한 통일촌 마을(아래)이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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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으로 인해 춥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지난 주말 저는 남한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DMZ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통일촌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친구들과 저는 도토리와 밤을 줍기 위해 아는 지인의 소개로 간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자 나무에 달려 있는 밤송이들이 후드득 머리위로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한 알 두 알 줍던 저는 어느새 신이 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떨어지는 밤을 줍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네요. 배고픔을 달래며 부녀회 식당으로 갔습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자리에 낯이 익은 분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해설원으로 다니던 그 때 식사 도중 잠깐씩 보아 왔던 분이었지만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식당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박물관으로 올라갔습니다.

박물관은 통일촌이 생긴지 40년 만에 주민들의 노력으로 인해 세워 졌다고 합니다. 통일촌이 건립되기 전에는 1972년 당시 1사단 사병들과 부사관들이 수냇벌 인근의 땅을 개간하여 '전진농장'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그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적십자 사무소를 순시하면서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 농촌을 건설하라'고 지시했고 73년 8월에 통일촌이 건립되었다고 해설원은 말합니다.

통일촌의 첫 입주자는 제대 장병 40호(가구)와 지역 원주민 40호(가구)로 제한되었다고 합니다. 통일촌 건립당시 이스라엘의 키부츠촌을 본따 낮에는 일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통일 정보 마을' '장단콩 슬로푸드 체험마을' 'DMZ세계화 브랜드 마을'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평화 통일의 거점 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설원은 우리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는 통일촌이 생긴 내력 중에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는 말이 새삼 귀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집 밖은 온통 미확인 지뢰지대', '광복과 남북 분단'이란 글발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통일촌의 역사와 마을 이름 그대로 남과 북이 서로 마주 서 있었습니다. 북한 인공기가 바람에 펄럭거리며 날리는 모습이 눈에 띠네요.

순간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손목에 이끌려 인민학교에 처음 입학한지 며칠 안 되어 도화 시간에 인공기를 그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나이가 40대 중반인 담임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제 뒤에 서 있었습니다. 인공기 안에 있는 오각별이 자꾸 삐뚤어지게 그려집니다.

한참을 보고 있던 선생님은 내 손에 들려 있던 연필을 받아 들고 대신 오각별을 그려 주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구는 북한의 인공기가 우리 태극기 보다 더 높은 것 같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 남한의 태극기의 높이는 100m이지만 북한의 인공기의 높이는 160m높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벼이삭도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빈털터리 쓸데없는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북한은 무엇이든 이곳 남한 사람들이 올려다 봐달라는 의미에서 인공기를 더 높이 매단 것은 아닐까요? 이런 얘기를 하는 나 자신도 북한 이탈주민으로 조금은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웃었습니다.

이곳 남한 친구는 이곳 남한은 쌀이 남아돌아 앞으로는 농사를 짓느냐 마느냐 하는데 북한 주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굶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시어머님 역시 고향이 개성이라고 합니다.

잠깐 친척 집에 다녀온다고 집을 나온 것이 가족들과 영원히 생리별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하네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고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족과 형제들의 소식을 모르고 살아 온지도 벌서 수십 년, 친구의 시어머니는 이제 고향은커녕 나이가 들어 집 문 앞에도 혼자서는 걸어 나오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걸어 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과연 통일을 보고 죽을 수 있을까를 주문처럼 외운다고 하네요. 이런 시어머님을 보는 며느리 역시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고 합니다. 민통선 안에서 이곳 남한 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과 함께 고향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