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외갓집으로 나들이 온 저의 손자를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친구들을 맞이하느라 저는 주말에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집에 온 손님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한상 차리고 나면, 또 다른 친구들이 와서 또 한상 차려야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속사정도 서로 털어놓는 친구들이라 몸은 비록 힘들어도 대접하는 제 마음은 즐겁기만 합니다.
손자를 안고 수다를 떨던 친구들은 손자 본 턱을 내라며 저를 못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양념갈비를 먹고 나서 2차로 노래방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간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는 3차로 호프집에 들러 시원한 맥주 한잔씩 하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말 모르는 중국 땅에서의 타향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고달팠지만, 오늘과 같은 이런 행복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것이 우리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다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난 시절의 고통이 사라진 듯 했지만, 그래도 그 때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했습니다.
한 친구는 중국의 어느 산골에서 살 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밤만 되면 제일 무서웠던 것이 짐승 울음소리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두만강 얼음을 건널 때 금방이라도 얼음이 깨질 것처럼 쩍쩍 소리가 날 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한 친구는 길 가던 중 공안 단속에 걸려 탈북자라는 것이 탄로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을 때 '이젠 죽었구나' 하고 기도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저는 문득 제 생명의 은인이 떠올랐습니다.
1999년 8월, 첫번째 북송되어 함북도 무산군 단련대에서 고초를 당하던 저는 가까스로 탈출해서 퉁퉁 부은 두 다리를 끌고 산속을 헤매다가 두만강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제 키보다 깊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거친 물살에 하염없이 떠내려가면서 저는 눈을 감고 '이젠 영락없이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공안에 잡히는 순간도 두려웠지만, 죽음을 떠올린 그 때가 제일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공포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내가 죽으면 이제 우리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 참기 힘들 정도로 가슴 아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죽는 줄만 알았던 저는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을 떠보니 저는 물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중국 화룡시 용연에 있는 중국 사람 집에 누워 있었습니다.
제가 눈을 뜨자, 살았다고 기뻐하는 집 주인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할머니는 자기 옆집 아들이 논에 시약을 뿌리는 중에 누군가 두만강 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봤는데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약통을 맨 채 두만강으로 달려갔고, 의식을 잃고 정처없이 떠내려가는 저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저를 직접 구한 옆집 아들과 할머니 모두 제겐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불시에 이뤄지는 변방대 검열 때문에 저는 낮에는 그 할머니의 집에서 병 치료를 받으며 쉬었고, 밤이면 강냉이 밭 깊숙한 곳에 들어가 담요 하나를 두른 채 숨어 지내야했습니다. 8월 말이라 모기의 독이 제일 독할 때였는데, 모기에게 물리면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던 그 때의 고생은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스러운 마음까지 듭니다. 한 친구는 중국에서 제일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친구에게 남한 돈 50만원을 부쳐 줬더니 그 친구가 너무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저는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은 그 친구가 부럽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이곳 남한에 도착한 뒤에 생명의 은인인 옆집 아들과 할머니에게 연락을 하려고 몇번 전화를 했는데 화룡시내로 이사를 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저는 언젠가 중국에 가면 꼭 그 분들을 찾아 고마움을 전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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