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27년 만의 강추위

광주 서구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민들이 외투로 몸을 두껍게 감싸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광주 서구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민들이 외투로 몸을 두껍게 감싸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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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추위는 27년 만에 찾아오는 강추위라고 합니다. 겨울 초부터 눈도 많이 내리고 영하 16도까지 떨어지며 강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년에 없었던 추위라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항상 강추위로 인해 옷을 따스하게 입고 출근길에 오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워 사고가 생길까 항상 주의하라고 방송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려주고 있으며 또 한편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말도 많이 하곤 합니다.

사실 내 고향 평양 날씨와 비교하면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거든요. 해마다 평양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니, 이곳 한국날씨의 추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춥죠. 하지만 북한에선 텔레비전과 방송으로 이런 뉴스를 해주는 것을 저는 반생을 살아오면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출퇴근길이면 대동강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얼음을 타고 다니는 시민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꽁꽁 얼었던 대동강 물은 3월 초가 지나야 얼음이 풀리게 됩니다. 제가 이곳 대한민국 서울에 정착해 산 지도 10년이 됐지만 그리 추운 날씨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번 설날은 맵짜고 쌀쌀한 날씨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제도 친구들과 함께 이런 얘기들을 주고받았습니다. 고향이 함북도인 친구들도 있었고 강원도, 황해도, 자강도가 고향인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북한에 비교하면 이쯤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올해는 별스레 춥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제가 이런 답을 해 주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든 택시를 타든 그리고 집이든 회사든 그 어디를 가도 난방장치가 돼 있어 항상 땀을 흘릴 정도인데 갑자기 더운 곳에 있다가 밖에 나오면 추위를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강도가 고향인 친구는 정말 그렇다고 말하면서 이곳 한국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두꺼운 뜨개 내의를 입지 않고는 겨울을 보낼 수 없었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얇은 내의를 입으면 괜히 전철이나 버스에서 땀을 많이 흘려 입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짓가랑이를 훌쩍 올려 보여 우리는 크게 웃었습니다.

저 역시 한국생활 10년이 됐지만 아직 겨울에 내의를 입어 보지 않았고 추운 겨울이지만 손발이 시려 본적이 아직 없다고 얘기하자 모두 공감했습니다. 교통수단이 매우 열악했던 평양에서는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려면 보통 2시간 정도 길거리에서 보내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손발이 시려 콩콩 뛰어야 했고 아이들은 부모들이 손을 잡은 채 엉엉 울곤 했는데 눈물이 흘러나오면 곧장 얼어붙곤 했습니다. 하기에 때로는 꽁꽁 언 손발을 두부 콩 무지에 묻어 언 독을 뽑아야 하기도 했고 갑자기 난로에 손발을 대면 아려 울기도 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곳 한국에 와 처음으로 서울에 집을 배정받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더운물과 찬물이 콸콸 쏟아지는 모습과 5분도 안 돼 방 세 칸이 뜨거워지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 이런 천국 같은 곳이 어디 있냐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요즘엔 추위에 대비해 관리 사무실에서 이런 방송이 자주 나옵니다. 날씨가 영하 16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돗물을 조금씩 틀어 놓으라고 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수돗물을 틀어 놓으라니 조금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평양에는 광복 거리, 통일 거리, 버드나무 거리 등 높은 아파트를 많이 건설해 수많은 시민들이 살고 있지만 전력 부족으로 수도압이 약해 수돗물은 1층에서 5층까지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기에 사람들은 수돗물을 가지고 아래층 사람들과 위층 사람들이 추운 겨울은 물론 사시사철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겨울 난방은 아예 보내주지 않습니다. 평천 화력 발전소도 있고 또 동화력 발전소를 건설했지만 석탄과 전기 사정으로 난방을 공급해 주지 못하기에 시민들은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 이불 속에 온 식구가 모여 서로서로 껴안고 자야했고 겨울에는 잘 때 신고 자는 신발과 버선도 따로 있어야 했습니다.

이불 속이라도 저는 아이들의 손발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주던 모습이 아직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입김으로 녹여 주노라면 고사리 같은 손발은 얼어 빨개져 있곤 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추워 밤새 잠들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것이 저 뿐만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 역시 모두가 겪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강도가 고향인 친구는 석탄이 아니라 나무를 때곤 했답니다. 저녁에 나무 몇 개를 아궁이에 넣어도 새벽이 되면 너무 추워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의 손발이 얼어 터져 항상 피가 흘러도 약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1년 열 두 달 탈곡을 한 볏짚과 콩깍지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황해도가 고향인 친구는 북한에서 겨울이 되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기가 너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이 들고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배고픔과 이 강추위를 어떻게 견뎌 내고 있을지가 더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