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탈북여성 가운데 제대군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삼모임. 너무도 새로운 용어이기도 합니다. 군복을 벗은 지 30년이 지난 오늘, 고향이 아니라 이곳 남한에서 제삼모임이라고 하니 왠지 낯설지 않으면서도 뭔가 새롭게 들렸습니다. 처음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서면서 어떤 모임인지 또 어떤 분들이 모일까? 하는 생각으로 조금은 궁금했지만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철을 타고 종각역 11번 출구에서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한 친구가 마중 나왔습니다. 그 친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평양모란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섰는데 접대원들의 옷차림부터가 어딘가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차림이었습니다.
또 하나 놀란 점은 여성 제대군인들이라 해 젊은 분들이라는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40대가 4명이고는 50대말 아니면 60대 들이었습니다. 나이 60이 지났지만 마음은 아직 20대 한창 군 생활 하던 그때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삶에서 "아직 살아 있네"라는 말이 나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고향과 직업 그리고 나이가 서로 달랐지만 처음부터 생각과 마음은 한 곳으로 흘렀고 어딘가 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서로 낯익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친구들이 더 많았습니다. 고향과 하나원 기수, 그리고 북한 군 생활 계급과 현재의 직업과 거주 등 순서대로 신고식을 했습니다.
육·해·공군이 다 모였고 심지어는 대남 방송을 하던 친구도 있었고 군수품 검사도 있었습니다. 그 중 반가운 것은 공군 출신이 3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하사관 출신들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또 한번 "역시!" 하는 감탄소리를 내자 모두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 기백 그 패기의 정신을 잃지 않고 이곳 한국에서도 열심히 노력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단체 대표도 있었고 또 의료원 상담사도 있었고 회사 사원도 있었고 하나원 기수는 모두가 100단위가 훨씬 넘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이곳 한국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은 친구도 있었고 하나원이 생기기 전에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지만 세대 차이와 직업과 고향은 서로 달라도 앞으로 친목회 형식으로 가끔 모여 식사도 하면서 서로 좋은 일, 슬픈 일 등 함께 풀어 나가며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도와 이곳 남한 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우며 앞으로 통일의 선봉대가 되자고 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자는 의미에서 친목회를 하자고 했습니다. 첫 회장으로 제가 선출됐습니다. 회원님들이 요청에 의해 제가 첫 건배 잔을 들어 개인과 나라의 발전과 통일을 위한다는 의미로 제가 "개통 나발을 위하여!"라는 선창을 떼자 한결같이 "위하여!"라고 잔을 들었습니다. 갈비찜에 만두, 가자미 식혜 등 갖가지 북한 음식들이 나왔습니다. 만두가 얼마나 큰지 웬만한 남자 손 주먹만 했습니다. 사장님에게 물었더니 직접 만두를 빚는다고 하네요. 그 중에 갈비찜 맛이 별미인 것 같았네요. 한창 손님 대접으로 분주하던 접대원들이 예쁜 한복으로 바꿔 입고 무대 위에서 노래도 부르고 손풍금도 치고 춤을 췄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마이크와 무대는 우리 여성 제삼들이 점거 했습니다. 순서대로 무대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게 시작 했습니다. 4군단 선전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친구의 노래는 정말 멋있었습니다. 비록 배우도 아니고 방송인도 아니고 가수도 아니었지만 모든 친구들이 그날은 배우이고 가수이고 방송인이었습니다. 행복과 즐거움 속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북한 사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고향이 북한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친구들이지만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노력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은 조금 짠했지만 아직 그 정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뭔가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얻어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들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두려울 이 없을 것 같네요. 지난 주말은 제삼들과의 좋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만 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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