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저녁 9시 SBS 방송 프로그램 '궁금한 이야기'를 저는 빠짐없이 시청하곤 합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때로는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롭고 다양한 삶을 엿보게 됩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어느 한 구치소의 생활 과정에 대해서 나왔습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본의 아니게 살인을 한 소년 범죄자들이 구치소에서 드림 합창단을 만들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들도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환영, 사랑을 받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10대 청소년은 술을 마시고 친구와 싸우는 과정에서 실수로 친구가 죽었고 그로 인해 살인 범죄로 구치소 생활을 몇 년째 한다고 합니다. 그 기간 어머니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의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한 그는 부모님을 만나 뵙는다는 기쁨과 설렘으로 노래를 불렀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건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취재 기자들의 설득에 아버지가 왔습니다. 몇 년 만에 이뤄지는 부자 상봉이라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들이 밉고,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은 죄가 밉고 또 죄를 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어야 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던 아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죄를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든 저렇든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또 그 인권이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 우선 믿어지지가 않았고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고 우렁찬 박수갈채를 쳐주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공연장으로 갈 때에는 두 손에 족쇄를 차고, 죄수복을 입고 갔지만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까만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강제 북송됐던 시절, 보위부 감옥과 청진 집결소에서의 짐승보다도 못한 수치감과 모욕을 받았던 생활이 텔레비전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습니다.
북한에는 6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고 가는 곳마다 감옥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수용소와 감옥에서 주민들은 인권이란 말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 마구 짓밟히고 있습니다. 더구나 살인이라고 하면 실수든 고의적이든 무조건 공개 총살당합니다.
그리고 어린 청소년들이든 어른이든 관계없이 낮에는 고역 같은 노동을 시키고, 밤에는 재우지 않고 참기 어려운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12살 어린 제 아들 역시 부모 잃고, 집 잃고 배고픔과 추위에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죄 아닌 죄로 19살까지 관리소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배고픔에 시달리다 굶어 죽고 추위에 얼어 죽고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지만 그들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대충 가마니에 말려 버려지거나 그냥 작은 개울가에 버려져도 누구 하나 가슴 아파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합니다.
가족들의 면회조차도 규정을 만들어 놓고 겨우 한 사람당 1년에 한두 번밖에 시켜 주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서 면회 식품이 들어오면 그나마도 중간에서 모두 가로채고 본인의 손에 닿는 것은 30%도 안 되었습니다.
본인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 제가 청진 집결소에 있을 때었습니다. 차디찬 시멘트 땅바닥에 깔개도 없고 덮을 것도 없이 자야 했고 이와 빈대에게 물려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온몸이 피부병에 걸려 있었고 허약과 영양실조에 걸려 앓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는 것이 죄가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에 시달려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인 대로 아무 것이나 먹었습니다.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호박 덩굴을 뒤져서는 날 호박을 따 먹었고 심지어는 밭에 있는 풀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뜯어 먹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토끼풀인 사라귀와 민들레 풀은 그야말로 고급이었습니다. 작은딸이 영양실조나 허약증에 걸려 죽을 것이 두려워 저는 화장실을 핑계 대고 옥수수밭에 들어가서는 이제 겨우 알이 들기 시작한 옥수수를 뜯어 강제로 딸에게 먹이기도 했고 날쌘 동작으로 오이밭에 들어가 오이를 따서는 딸의 입에 쑤셔 넣어 주기도 했고 날랜 동작으로 먹지 못하는 딸을 꾸지람도 했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는 시커멓고 멀건 시래기 국물 한 공기를 먹는 것이 고작 전부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려야 했으니 배고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도 누구 하나 동정하려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코도 제대로 씻을 수 없는 인권의 초보적인 상식도 모르는 짐승보다도 못한 곳에서 누구 동정해 주거나 또 누구의 동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초보적인 감정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이 굴에서 살아남아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이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당국은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부터 심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편은 당원이 무단결근과 장사를 했다는 두 가지 이유로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남동생은 중국에서 이곳 대한민국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오늘날까지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여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기에 저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와 감옥에 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비록 남에게 피해를 준 죄를 진 범죄자들이지만 구치소에서 자기 취미에 맞는 문화생활도 할 수 있고 텔레비전도 관람할 수 있고 부모 형제들이 면회도 편안하게 자주 할 수 있고 현금도 넣어 줄 수 있고 면회품도 자유스럽게 들여보내 줄 수 있는 모습을 보면 이곳 대한민국 구치소 생활 역시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해 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