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남과 북의 초등학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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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저는 손녀의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를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취학통지서를 들고 학교정문으로 들어섰습니다. '현덕 초등학교'라는 큼직한 글발이 한눈에 들어왔고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참 세월은 냇가의 흐르는 물보다도 더 빠르다는 생각과 함께 손녀가 벌써 이렇게 자라 학교에 입학한다니 남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선 어디로 발걸음을 향할까 생각하다가 저는 무턱대고 학교 교무실로 갔습니다. 한손으로 조용히 문을 두드려 취학통지서를 들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제일 젊고 예쁘게 생긴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며 2층 1학년 1반 교실로 가시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습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 저는 앞으로 손녀딸이 공부하게 될 교실을 한번 휘 둘러보고는 맨 앞줄에 있는 책상에 앉았습니다. 키가 작은 의자에 앉아 칠판을 바라보는 순간 어릴 적 동심 시절로 돌아 간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만 동시에 탈북해 이곳 한국으로 오는 과정 중에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 과거, 잊기엔 너무도 혹독했던 아픈 일들과 또 이곳 한국에서의 너무도 행복한 새 삶이 내 집에 있는 것보다도 두 배나 큰 교실의 텔레비전 화면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듯 비쳤습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잠시 후 나이 지숙한(지긋한) 선생님이 두꺼운 여러 봉투들을 손에 들고 들어왔고 학부모들도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주시는 신입생 신청 카드에 적힌 손녀딸의 이름, 학부모의 이름과 함께 취미와 희망에 대해 하나하나 작성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에게 물어가며 열심히 작성했습니다.

다른 학부모들보다도 유별나게 자꾸 묻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민망스러웠습니다만 저는 이내 조심스레 윗동네에서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얘기를 듣더니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주시기도 했고 유치원에서 심부름을 온 손녀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너무 똑똑하고 예쁘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부모들은 아이와 함께 학교에 왔는데 저는 그만 혼자 갔습니다. 서류 작성을 마친 저에게 선생님은 신입생들의 개인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언제 시간이 되냐고 다시 묻기에 저는 다음날 즉시 손녀와 함께 찾아뵙겠다고 약속을 한 뒤 교실 문을 나섰습니다. 학교 정문을 나서는 순간 저는 고향에서 우리 아이들의 입학 신청하던 지난날을 추억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떠올려도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선 북한에서는 취학 통지서는 별도로 없습니다. 이미 학교와 인민반장들이 조사해서 작성한 명단이 있거든요. 학부모들은 정해놓은 시간과 장소에 가서 명단과 출생증을 대조합니다. 그러면 신청을 받는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학부모 직업을 적은 다음 학교에서 필요한 내용들에 대해서 알려주고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당시 남편은 쉽게 말하면 유사시에 평양시 김부자 유화 작품을 운반하는 정무원 기동대였는데 차들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라 휘발유나 디젤유를 많이 사용하는 기업소인지라 저는 학교에 휘발유 50kg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 때부터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월동 준비할 때나 차를 쓸 일이 있을 때마다 휘발유나 디젤유, 그리고 자동차를 무조건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딸 부잣집에서 자랐기에 우리 가정에서는 아들을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집에서 남자들이라면 하늘처럼 모시는 것 밖에 배운 것이 없기에 사실 두 딸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관심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다 보니 선생님들은 서로 다 통했습니다.

한번은 작은 딸의 학부모 모임이 있어 학교에 갔었는데 선생님은 섭섭한 얘기부터 장시간 늘어놓았습니다. 애들 아빠가 차를 직접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연유 탱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상황이 너무도 딱했습니다. 정말 그때 난처했던 제 모습이 지금도 저는 생생합니다.

북한은 세금이 없는 나라이고 또 무상치료, 무상교육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직접 돈을 내는 것은 없지만 학교에서 내라고 하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꼬마 활동 계획을 한답시고 토끼 가죽과 개 가죽, 파철을 바치도록 했고, 심지어는 인민군대와 탄광, 그리고 농촌, 건설 노동자들 물자 지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동원됐습니다.

심지어는 농촌 분토과제를 하기 위해 아이들이 삽 곡괭이를 들고 꽁꽁 언 강하천을 파기도 하고 조금은 누추하고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인분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화장실 문을 지키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내라는 것이 많아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과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 드는 아이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하기에 저는 손녀의 초등학교 신입생 등록을 두고도 이렇게 남한과 북한의 두 현실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손녀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또 북한의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