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두 딸이 살고 있는 평택으로 나들이 간 저는 두 손자 손녀의 손목을 잡고 경기도 안중시내 길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비록 겨울이었지만 날씨는 마치 제 마음을 헤아려 주듯 맑고 따뜻했습니다. 양손에 두 손자의 손목을 잡고 걷는 저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잠시 잠깐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상인들을 보느라 한 눈을 팔고 있는 순간, 손녀는 날쌔게 제 손목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달려갔습니다. 차들이 분주한 좁은 골목이라 마음이 조급했지만 너무도 빠르게 달리는 손녀의 달리기 솜씨에 순간 저는 놀랐습니다.
막 달려가던 손녀가 멈추어 선 곳은 바로 사진관 앞이었습니다. 손녀는 제법 고사리 같은 하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기 때 찍은 제 사진이 있다고 큰 소리로 자랑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손녀의 첫 돌 사진과 100일 사진이 예쁜 액자에 넣어져 있었습니다. 제 딸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아기 때 찍은 손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곤 한다고 합니다. 누가 물을세라 조잘 조잘 제 자랑을 곧잘 하는 손녀의 손목을 잡고 저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정말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은 손자 손녀들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쑥쑥 커가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마냥 즐겁고 행복합니다.
저는 손자 손녀에게 선물하려고 장난감을 판매하는 완구 상점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두 아이들은 내 손목을 뿌리치고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느라 분주했습니다. 아이들 눈에 먼저 띈 것이 있었습니다. 노란색을 띤 자동차였습니다. 아이들 눈높이를 잘 모르는 저는 항상 손자 손녀의 선물을 구입할 때에는 아무리 아이들이지만 그들에게 맡기곤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비록 어리지만 먼 옛날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랍니다. 옛날엔 엄마인 내 자신이 마음에 들면 아이들도 그저 머리를 끄덕이곤 했지만 요새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은 뭐든지 꼭 제 마음에 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옷이나 장난감을 구입 할 때에는 꼭 두 손자 손녀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아이들은 꼭 같은 자동차를 구입해 차에 싣고 오리전문 식당으로 갔습니다.
오랜 만에 온 가족이 모여 함께 하게 되는 행복한 외식이었습니다. 식사가 마련되고 있는 시간에 사위들은 하나밖에 없는 처남이 빨리 결혼을 해야 된다는 등 또 조금 더 크고 좋은 차로 바꾸고 싶다는 처남의 말에 아직은 아니라는 등 충고도 해주고 놀려 주기도 했습니다. 오랜 만에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떠는 그 시간, 그런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잠시 잠깐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남편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다섯 살짜리 손녀딸이 기도를 하겠다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순간 얼떨떨해진 식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용해졌습니다. 손녀는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종알종알 말했습니다.
손녀의 기도가 끝나자 궁금증이 많은 저는 뭐라고 기도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손녀딸은 감기로 기침을 잘하는 사촌동생 선우가 아프지 말고 누나 팔을 물지 말라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순간 저는 너무도 큰 충격으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손녀는 제 엄마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도 역시 손녀는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은 모두 8명이었는데 대다수가 초등학교 학생들이었고 5살짜리 남자 애와 손녀가 제일 어린 아기였습니다.
목사님이 세례 절차상 머리에 뿌려주는 포도주를 보노라니 제 마음은 혹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했습니다. 왜냐하면 손녀는 물이 머리에 묻거나 옷에 묻는 것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드디어 순서가 되어 손녀는 엄마의 손목을 잡고 목사님 앞에 있는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을 보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마치 제 자신이 세례를 받는 듯 했답니다.
머리에서 포도주가 몇 방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손녀는 너무도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5살 밖에 되지 않은 손녀의 어른스러운 모습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기도를 할 정도로 다 자란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에 저는 손자 손녀 자랑을 하는 수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보면 뭐가 그리 자랑할 것이 많은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는 출퇴근길에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손자들 자랑을 하는 모습을 혹 볼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당생활 총화 모임에 와서도 손자들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때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제 처지가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손자들 자랑밖에 할 소리가 없는 듯합니다.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손자들이 모두 있기에 손자자랑을 하려면 앞에다 돈을 내놓고 하라고 농담하기도 합니다. 회사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도 때로는 친구들과 전화 통화에서도 심지어는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저는 손자들 자랑이랍니다. 그러면 어떤 친구들은 세상에 저 혼자만 손자가 있는 듯 하다고 놀리기도 해 친구들에게 밥도 수없이 사주곤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할미가 사준 빨간 솜 동복에 빨간 왈랭키(부츠)를 신고 함박 눈꽃이 핀 나무 앞에서 찍은 손녀의 사진을 손전화기 메일로 보내 왔습니다. 매일 매일 두 딸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손전회기로 어린이 집에서 재롱을 부리며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을 손전화기의 메일로 찍어 보내준답니다.
함께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들은 항상 저를 부러워합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손녀와 전화 통화를 하곤 하는 것이 이젠 습관이 됐습니다. 이젠 세 살짜리 손자도 전화기로 할머니라고 부르곤 합니다. 제가 우리 애들을 키우면서 해주고 싶어도 해주지 못한 모든 것을 오늘날 우리 손자들에게 뭐든 제일 좋은 것으로 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이 좋은 세상에서 제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한 새 삶에 대해 저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 정부에 항상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곳 대한민국에 오지 못하고 북한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한 가지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날 이런 행복한 새 삶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