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합의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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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는 서울 남부법원을 다녀왔습니다. 한 달 전에 합의이혼을 신청할 때도 그랬지만,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미리 도착해 2층 의자에 앉아서 초조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면서 지난 추억들을 떠올렸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어렵게 온가족이 함께 한국에 와서 딸자식들은 남부럽지 않게 결혼을 시키고, 아들도 직장에 잘 다니고 있지만, 정작 제 자신의 사랑에는 실패했다고 말입니다.

3년 전에 저는 아이들에게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늦게나마 행복한 저만의 가정을 갖고 싶어 재혼을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만약 북한이 개방되면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고향에 가서 형제자매들에게 저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지'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다짐을 했던 게 엊그제만 같은데 결국 제 두 번째 결혼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고향 평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결혼생활은 두 번째도 실패하고, 세 번째도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제 경우를 보니 옛말에 그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의이혼을 신청하고 나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최종 판결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법정에 서야 한다는 것이 부담도 되고,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상심이 컸습니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곳 대한민국을 찾아온 우리 가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잘 정착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겠구나 생각하니 제 마음이 너무나 괴롭고, 무거웠고 참 많이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재혼을 하지 않았으면 이혼도 없었을 텐데' 후회하고 있는데 어느덧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조금은 떨리기도 했습니다. 담당 법원 주사님이 저와 마찬가지로 합의이혼 신청을 한 사람들의 출석을 부르면서 이혼신고서를 한 장씩 주면서 작성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드디어 제 순서가 되어 판사님 앞에 섰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순간이었습니다. 두 가지 물음에 답변을 하자 합의이혼이 성립됐다며 합의이혼 등본을 줬습니다. 2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단호한 결정을 한 제 모습에 저 역시 놀랐습니다. 평양에서는 어떤 이유로 이혼을 했든지 간에 이혼을 하면 지방으로 추방돼야 하지만, 남쪽에서는 전혀 그럴 일이 없습니다. 최종 이혼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착잡하고, 고민도 많았지만, 판결이 내려진 뒤엔 생각과는 달리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살을 맞대고, 몇십년씩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가며 살던 부부들도 이혼을 하는 마당에서는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움을 한다고들 하는데 저와 함께 있던 부부들 중엔 웃으면서 깨끗하게 헤어지는 부부들도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내친 김에 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 접수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 40분이 걸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하얀 눈은 소리 없이 제 어깨 위에 내렸습니다. 조금은 허무하고 서글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지 이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혼 사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대체로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하는 이혼이 많습니다. 합의 이혼이라는 것은 부부의 자유로운 의사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이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합의 이혼을 하려면 우선 부부 쌍방이 이혼하는데 합의를 한 뒤 이혼하겠다는 의사를 판사 앞에서 진술하여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족관계 등록관청에 이혼신고서를 접수하면 합의 이혼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법원에 이혼 신청을 한 뒤에 1개월에서 3개월 동안의 이혼 숙려기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혼 숙려기간이라는 것은 합의 이혼을 신청할 경우, 너무 성급한 이혼을 막기 위해 부부 쌍방이 서로 다시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한국에서 이혼은 부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지만, 북한에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강제 이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아들딸을 낳고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부부 중에서 어느 한쪽 가정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부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법적으로 강제 이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평양에서는 부부 쌍방이 합의를 해서 한 이혼이라고 하더라도 이혼과 동시에 지방으로 추방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살았던 마을에서도 순안 비행장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부부가 서로 합의 이혼을 하는 바람에 그만 함남도로 추방되었습니다.

북에서는 이혼을 하면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다행히 대한민국에선 그럴 일이 없습니다. 제게 이혼의 경험은 아픈 기억이겠지만, 또 다른 인생 수업을 했다고 생각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