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과일 구경도 못하는 북 주민들

설날인 8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열린 합동 망향제에서 실향민 가족들이 북녘을 향해 절하고 있다.
설날인 8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열린 합동 망향제에서 실향민 가족들이 북녘을 향해 절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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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둥근 식탁에 빙 둘러앉아 푸짐한 식사를 마친 뒤 과일과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담가 만든 오미자 음료수에 빨간 딸기, 사과, 배, 한라봉 그리고 손자들이 좋아하는 바나나를 먹고 있는데 유별나게 길고 큰 바나나를 먹던 아들이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고향이 함북도 무산인 제 친구 철이가 이곳 한국에 처음 와서 바나나를 누런 오이로 착각하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먹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참 배를 쥐고 웃고 있는데 올해 8살이 된 개구쟁이 손자 녀석이 내 동생도 아기 때 바나나를 껍질 째 먹은 적 있다고 한마디 참견합니다. 항상 엄마가 껍질을 벗겨 먹여 주던 것만을 먹던 제 동생이 2살 때 바나나를 껍질째로 먹었었는데 엄마가 큰일 나게 빼앗으면서 괜히 오빠인 제가 꾸지람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2살짜리 아기가 바나나를 껍질째로 먹었다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다 자란 성인이 바나나를 누런 오이로 착각하고 껍질째 먹었다면 어떻게 이해할까요. 사실 북한 주민들은 북한에서 나는 흔한 사과나 배를 비롯한 과일을 누구나 실컷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구나 바나나 같은 남방 과일은 구경도 못 하고 사는 주민들이 대다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평양시민들은 1년에 두 번 정도는 남방 과일인 바나나와 귤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만 지방 주민들에게는 그나마도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제가 탈북하기 전에도 평양시민들에게는 김일성 생일과 김정일 생일에만 1인당 때로는 바나나 1개씩 또 때로는 귤 1개씩 차례질 수 있게 식구별로 공급을 해 주었습니다.

하기에 평양시 주민들은 그나마 바나나와 귤을 맛볼 수 있었지만 지방에서 자라면서 평생 바나나와 귤을 맛은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 탈북자들이 이곳 한국에 와서 바나나를 누런 오이로 착각을 하고 껍질째로 먹으려던 친구들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귤도 껍질째로 먹다가 쓰다고 뱉어 내는 모습을 여러 번 보면서 이것 역시 사소하지만 비극이 아닌가 했었거든요.

하기에 저는 맨 처음 이곳 한국에 와서 시장에 갔을 때 열대 과일인 바나나, 귤을 비롯한 이름 모를 과일들과 그리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나오는 빨간 딸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이곳 한국에는 추운 겨울에도 딸기를 비롯한 수박, 참외 갖가지 과일들을 먹을 수 있답니다. 하기에 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구입해 평양으로 보내고 싶은 심정이 정말 굴뚝같습니다.

언제인가 북한에 남아있는 형부의 환갑 사진을 받은 적 있습니다. 그 환갑상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잘 익고 큼직한 바나나였거든요. 이렇게 북한 주민들도 결혼식 상이나 환갑상에 남방과일을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손녀 딸애가 제 주먹만 한 빨간 딸기를 들고 와 할미 입에 넣어 줍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잘 익었는지 진한 딸기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솔솔 녹아내립니다.

북한에는 이런 옛 얘기가 있습니다. 먼 옛날에 황지주가 살았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 겨울 추위에 9살 머슴 소녀에게 산딸기를 따오라고 산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얇은 홑옷만을 걸친 어린 소녀는 추위에 꽁꽁 얼어 견디다 못해 울다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나타나 왜 여기에 쓰러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소녀는 주인이 산딸기를 따오라고 해 이 산속에 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꿈속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불쌍한 그 소녀에게 빨간 산딸기를 한 가득 쥐여 주며 추운데 빨리 주인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소녀는 손에 들려 있는 빨간 산딸기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빨간 산딸기를 주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주인은 그만 산딸기를 먹고 눈사람이 되어 꽁꽁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차려 나온 과일 상을 보면서 손녀딸애가 제일 좋아하는 귤이 없네, 하고 말하자 손녀딸애는 한라봉이나 귤이나 맛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하네요.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크게 웃었습니다. 먹을거리가 수없이 많은 요즘 세월이지만 엄마들은 맛있고 좋은 것으로 또 요즘은 웰빙으로 건강에 좋은 것으로만 골라 먹이다 보니 애들도 좋은 것을 잘 안답니다.

음력설이라 하지만 먹을 걱정이 없는 이곳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특별한 명절 준비가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올 설 명절에도 먹을 것, 땔감이 모자라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을 내 고향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