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6일이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사망한 김정일의 생일인 이날 북한에서 제일 가까운 곳인 임진각에서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 보냈습니다. 아침 일찍 저는 이제 7살 되는 손녀 딸애와 함께 임진각으로 갔습니다. 저는 차창 문을 열고 손녀 딸애에게 통일 전망대를 가르쳐 주었고 그 건너편에 있는 북한 땅을 가리키며 할머니의 고향이라고 처음으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빤히 바라보이는 고향이지만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는 전단을 바라보며 손녀는 날개가 있으면 전단과 함께 날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정말 천진난만한 7살짜리 손녀딸애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그리고 훨훨 날아가는 전단을 보니 저 역시 함께 날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고향을 빤히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니 더더욱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언제 면 나도 전단지처럼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롭게 고향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다음날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북한의 핵실험을 반대하는 횃불 집회에 손녀딸애와 함께 갔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북한이 로켓 발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손녀딸애는 저에게 로켓이 어디로 날아가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저 간단하게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을 향해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라고 쉽게 얘기했습니다.
옆에 나이 많은 어르신이 손녀의 말을 듣고 북한이 어디 있는가 다시 한 번 반복해 물었는데 또박또박 북한은 우리 할머니가 태어난 곳이라고 해 저는 다시 한 번 손녀의 얼굴에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손녀의 머리에도 북한 핵실험 반대 촉구라는 빨간 띠를 매고 사진 한 장을 찍기도 했습니다.
저는 횃불 행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잠에 곯아떨어진 손녀를 등에 업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한 하늘 밑, 한 지붕아래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경제적 생활 차이와 이념이 서로 다른 남과 북이 언제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볼 수 없어도 내 손자들은 물론 우리 자식들 대에는 꼭 내가 나서 자라고 정들었던 고향,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가 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제 겨우 7살 된 어린 손녀에게 할머니 고향에 대해 아직 떳떳이 얘기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더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엄마 고향과 할미 고향에 대해서 얘기해줄 수 있을 그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탈북자들에게 '지금 북한 주민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굶어 죽고 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주민들이 8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막대한 돈을 들여 핵실험을 서슴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 당국이 핵실험을 중지하고 북한 주민들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해방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힘차게 말했습니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과 관련해 연이어 진행하는 규탄 행사에 손녀딸과 함께 참가하면서 지난날에는 너무 어렸고 이곳에서 태어나 행복함밖에 모르는 손녀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들, 하기 두려웠고 힘들었던 고향이야기를 이제는 떳떳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이는 비록 7살짜리 어린아이지만 속은 다 자랐다고 생각을 하니 뿌듯하기도 했고 내 인생 헛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저는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됐습니다. 잠에 취한 손녀를 등에 업고 집으로 오면서 조금은 무겁고 힘들었지만 과연 내 손녀로구나 하는 대견한 마음에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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