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봄비가 하루종일 내렸습니다. 원래 봄비가 많이 내리면 그 해 농사는 대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산을 쓰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갑자기 입이 궁금해졌습니다. 집에 가면 무엇을 해 먹을까 궁리를 하던 차에 얼마 전에 아들이 구입해 온 속도전 가루가 생각이 났습니다. 속도전 가루라는 것은 옥수수로 긴 펑펑이를 뽑아서 다시 그것으로 가루를 낸 것인데, 아마도 고향 분들은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속도전 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으로 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비닐자루에 담겨 있던 속도전 가루를 담아서 친구 영숙이네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 영숙이와 저는 속도전 떡을 빚어 봄비 축제를 하자면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탈북여성 대갑이 엄마도 불렀습니다. 마침 영숙이네 집에는 대학교에 다니는 예쁜 두 딸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저는 깨끗하고 큰 소랭이에 속도전 가루를 담고 끓인 소금물을 부어 떡을 빚었습니다. 어느 새 먹음직스럽고 노란 빛깔을 띤 속도전 떡이 완성됐습니다. 고향에서는 그 흔한 강냉이로 만든 떡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먹을 수 없었던 한 맺힌 속도전 떡이었습니다.
속도전 떡을 눈같은 하얀 설탕에 찍어 한입에 넣었던 대갑이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영숙이네 두 딸은 속도전 떡을 한손에 쥐고 입에 가져가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는 문득 속도전 떡을 어이없이 뺏겼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장마당에 갔다가 배가 출출해 제일 값싼 속도전 떡을 하나 사서 입에 가져가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속도전 떡을 채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까만 어린 학생이 히죽이죽 웃으며 제 속도전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그 아이가 불쌍하기도 해서 그 아이를 따라 그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평양시에서는 강냉이 1kg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가을에는 지방에 가서 강냉이를 조금 구입해 왔습니다. 저는 눈을 꾹 감고 밥 공장에 가서 속도전 가루를 교환해 왔습니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속도전 떡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는 강냉이 1kg이면 속도전 가루 800g이었는데 저는 강냉이 2kg을 가지고 1.6kg을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정도 양이면 우리 가족이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실컷 먹지 못했다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한창 클 아이들에게는 부족한 양이었나 봅니다.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2000년에 북송돼 청진집결소에 있을 때는 동생들이 들여보내준 이 속도전 가루가 있어서 하루에 한 덩어리씩 빚어 먹으며 겨우 허기를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속도전 떡을 한입 먹으면서 제가 '북한 감옥에서는 공개 총살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이라던데....' 라고 말했더니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습니다.
회령이 고향인 대갑이 엄마는 장마당에서 파는 속도전 떡을 먹고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죽는 사람을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속도전 떡은 강냉이 가루이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반죽해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는데, 장사꾼들은 하루종일 장마당에서 한 개 두 개 팔아야 하기 때문에 굳어지지 말라고 그 속에 잿물을 섞곤 하는데 잿물 양을 잘 맞추지 못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위장이 크게 상하고, 식도가 타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대갑이 엄마가 목격했던 것처럼 속도전 떡을 사먹고 그 자리에서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좋은 음식은 아니었지만, 고향 음식이 먹고 싶을 것 같아서 평택에 있는 두 딸에게도 속도전 가루를 5kg씩 구입해 보냈습니다. 이 곳에 탯줄을 묻고 살아온 두 사위와 사돈 내외에게는 속도전 떡이 별미였나 봅니다. 속도전 떡을 맛보고는 다들 참 맛있어 한다며 딸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는 속도전 떡이 더 이상 한맺힌 음식이 아니라 별미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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