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과 고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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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꽃샘추위가 언제 있었는가 할 정도로 따스한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사부인이 며칠 동안 나들이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말이 사부인이지 사실 동생 언니 사이 같고 때로는 친구 같은 사부인입니다. 지난 세월 아픈 추억과 즐거웠던 추억으로 밤 가는 줄 몰랐습니다.

뜨거운 찜질방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함께 지나간 고향에서 뜨거운 가마 불에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증을 하던 추억을 나누었고,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함께 구입 하면서 지난 세월 마음 아팠던 얘기와 재미있었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3박 4일 동안 24시간 기나긴 수다로 보내는 여자들을 처음 본다고 남편이 한마디 참견합니다. 남편이 주는 핀잔 역시 그리 싫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우리는 농장으로 갔습니다. 벌판에는 파란 냉이가 한 가득 합니다. 봄 날씨 치고는 따스하고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농촌에서 자란 사부인은 파란 냉이를 보자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호미를 찾아 들고 좋아 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파란 냉이를 한 소랭이 캤습니다. 저는 민들레를 한 가득 캤습니다. 봄나물을 캐면서도 우리는 고향 얘기를 합니다. 함북도가 고향인 사부인은 봄이 오면 산나물이란 산나물과 들나물이란 들나물을 많이 뜯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강제 북송되어 고향으로 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6개월 만에 퇴소되어 집이라고 찾아 갔는데 남편은 이미 재혼을 해 들어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갈 곳이 없어 이집 저집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구 집과 조금 아는 집들을 찾아 전전하던 끝에 배고픔을 참지 못해 눈에 들어오는 냉이를 뜯어 먹었다고 합니다. 분명 입에 냉이를 뜯어 넣었는데 너무 쓰다 못해 뱉어 보니 냉이가 아니라 민들레였다고 합니다.

비록 토끼풀이라 하지만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쓰디쓴 민들레를 정신없이 뜯어 먹었기에 죽지 않고 오늘날 이곳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눈에 눈물이 글썽합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사부인에게도 나와 같은 아픔과 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민들레는 항생제로 사용되는 약초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님은 봄이 되면 자주 옥수수 밭에 갓 돋아난 민들레를 뜯어다가 데쳐서 된장에 무쳐 주었거든요. 철없던 어린 시절, 저는 토끼풀이라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입이 까칠한 저를 탓하며 이런 것을 먹어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루가 몰라보게 빨리 자라 어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말에 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눈물을 머금으며 먹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어린 마음에도 빨리 자라 어른이 되어 지방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아버지 대신 홀로 우리 7남매를 키우며 고생 하시는 어머님의 건강을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부모가 된 지금 어린 시절부터 민들레를 비롯한 많은 약초를 먹고 자란 탓에 지금 이 나이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만 이곳 한국에 온 지금도 봄이 되면 꼭 냉이를 비롯한 달래, 민들레를 뜯어다가 볶은 된장에 무쳐 먹곤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어머님이 무쳐주시던 그 맛은 아닙니다.

사부인과 함께 냉이와 달래 그리고 민들레도 듬뿍 캤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약초로 이용했었고 또 고난의 행군 시대에는 식량 대신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이 먹었던 냉이와 민들레, 오늘은 건강식품으로 한 가득 뜯었습니다. 저녁 반찬은 사부인과 함께 캐어온 냉이국에 민들레와 달래 무침에 둥근 밥상에 온 식구가 빙 둘러 앉았습니다.

남편도 별미라 합니다만 아들 며느리도 맛있다고 합니다. 사돈과 함께 뜯은 봄나물에 온 식구가 행복해 하는 모습 앞에서 또 한 번 지나간 세월을 추억해 봅니다. 인간에게 초보적인 먹는 것 걱정으로 풀을 뜯어 하루하루 생계를 겨우 이어가던 지난 세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고향 주민들 누구나 겪었던 지난날의 아픔이 지금도 현실로 이어 지고 있는 북한. 북녘의 고향사람들을 생각을 하니 더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봄나물을 캐며 사부인과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 남은 인생을 지난날의 아픔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보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가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고 말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