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청소와 북한의 위생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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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월 화창한 봄이 왔습니다.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봄바람에 봄내음이 실려 들어옵니다. 어느새 활짝 핀 목련화 꽃향기가 방 한 가득 채우네요. 북한에서의 3, 4월은 위생 월간의 달입니다. 요즘 내 고향 주민들은 집집마다 마을마다 위생 문화사업의 하나인 대청소를 하느라 매우 분주하리라 봅니다.

이곳 한국에서의 봄철 위생문화 사업은 그냥 하루 종일 쏟아져 나오는 물로 쓸고 닦으면 됩니다만 부족한 것이 많은 내 고향 주민들에게는 봄철 위생사업도 하나의 근심걱정 꺼리이고 특히 여성들에게는 너무도 큰 부담이 됩니다. 시간제 물이라 물도 모자라고 벽지와 장판을 하려고 해도 시장에서 구입 하려면 식량 값보다 더 많은 돈이 들고 빨래 비누도 쉽게 구하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돈이 없으면 어느 한 가지도 해결할 수 없거든요.

추운 겨울 내내 한 번 열어 보지 않은 창문턱에 끼어있는 까만 먼지를 털고 또 닦아 내고 안방, 작은방 서재와 거실을 열심히 닦고 쓸고 문지르고 하다 보면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흐릅니다. 북한에서 위생사업 때마다 청소하던 직업병이 도졌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무슨 방이 이리도 많을까'라며 혼자 말로 구시렁대던 지난 세월이 새삼 떠오릅니다.

작은 방 한 칸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잠버릇이 유난히 나빴던 아들 녀석이 이불을 걷어차면 조금 예민한 성격을 가진 작은 딸애가 춥다고 잠결에서도 제 동생을 나무랐고 서로 자기 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자주 했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부모인 제 마음은 너무도 아팠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주지 않은 북한사회에서 그래도 겨울에 나무라도 피우면 조금은 나을까 싶어서 아파트와 단층집을 바꿨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창문은 자기 몫이라고 하면서 물걸레를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듣던 중 고마운 말이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한창 욕조를 닦았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욕조를 보는 순간 또 한 번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곳 한국에 처음 와서 관리 사무실에서 열쇠를 받아 들고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좔좔 쉼 없이 쏟아지는 수돗물을 보고 딸들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감탄했습니다.

두 딸들은 서로 방 하나씩 차지하고는 스스로 자기들 방이라고 열심히 청소를 했습니다. 거실을 청소 하는 이 엄마에게 능청스럽게 한마디 합니다. 엄마는 거실을 차지하고 베란다는 자기 방이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자기 방을 가지고 싶었으면 저럴까,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든든한 어른이 된 우리 아이들이 너무도 대견했습니다.

순간 화장실로 들어가던 아들은 반짝반짝 광채가 나는 욕조를 보는 순간 목욕탕에 갈 근심 걱정이 없다고 어린 꼬마처럼 좋아합니다. 가족과 함께 헤어져 몇 년 만에 만나 중국을 출발해 이곳 한국으로 오는 내내 이 엄마에게 별로 말도 없었거니와 웃음 한 번 없었던 아들이 별거 아닌 욕조를 보고 활짝 웃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때 그처럼 기뻐하고 행복해하던 아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아들의 첫 웃음을 보는 순간 제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 욕조에 따끈한 물을 가득 채워 놓고는 물속에 첨벙 들어가 눕기도 했습니다.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고기가 한동안 물을 떠났다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간 듯 했습니다.

시간제 물로 항상 쫓기며 한 방울이라도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온 우리 아이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도 물이 끊겨 세수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나올 수밖에 없었던 우리 아이들. 창광원(대중 편의봉사시설)에 들어가서도 시간이 제한 없이 자유롭게 물을 팡팡 사용하지 못하고 관리원의 통제와 독촉에 시달려 오던 우리 아이들이기에 이렇게 수돗물과 욕조를 보고 신기하고 놀라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엄마이기에 더더욱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짠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엄마가 지어준 밥이 생각난다며 찾아온 아들은 벌써 회사를 출발하면서 욕조에 물을 받아 놓으라고 전화 합니다. 30분 넘게 따끈한 물속에 들어가 좌욕을 한 아들은 시원하고 개운한 몸으로 매콤한 매운탕과 달래 무침에 저녁 식사를 하며 역시 우리 엄마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30살이 지난 아들이지만 때로 저에게는 아직도 어린 12살 개구쟁이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대견하고 듬직한 이런 아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는 생각도 함께 해 보네요. 화창한 봄날 집안 청소를 하면서도 지난 세월 고향에서 고생하던 추억과 함께 고향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