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곳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수는 3만 명이 넘었습니다. 작은 숫자라면 작은 수이지만도 따지고 보면 대단한 숫자입니다. 제가 이곳 한국에 처음 왔을 때에는 그저 몇 천 명의 탈북자가 전부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만 명 시대가 되었다고 했었고 벌써 3만이 넘었네요. 이곳 한국에 처음 도착하는 순간부터 저는 북한 주민들 전부가 다 이곳 자유민주주의 나라로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습니다.
해마다 한국에 들어오는 탈북자 수가 늘어나는 것과 함께 통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보기도 했었거든요. 저는 엊그제 인터넷에서 김정은이 북한 군부내 탈북자 직계가족은 물론 탈북자를 친인척으로 둔 군인도 예외없이 제거하라는 지시를 하는 동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북한 실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저는 마음이 아팠고 지나간 탈북과정의 고통과 아픔을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이곳 한국으로 왔습니다. 이곳 한국에 도착하기까지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두 번의 강제 북송과 함께 중국 청도에서 국경으로의 행군, 한치의 앞도 가려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높은 숲속을 헤치며 산을 넘어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습니다.
하노이에서 한글로 쓴 음식점으로 찾아 들어 갔을 때에는 정말 만세를 불렀습니다만 그 시점이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장님의 소개로 하노이에서 사이공까지 38시간의 열차 여행과 함께 사이공에서의 50일, 공안의 고발로 허허 벌판에서의 2일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순서가 되어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길 역시 앞이 보이지 않은 캄캄한 밤에 산길과 벌판, 때로는 진펄과 좁은 논두렁을 걸어야 했고 가시 철조망으로 펼쳐진 국경을 넘어야 했고 때로는 악어가 우글거리는 호수를 작은 쪽배를 타고 건너야 했고 작은 승용차 안에 12명이 타고 수십리 길을 달려야 했습니다. 숨 쉬기 조차 어려웠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과 캄보디아 사람들로 교대되어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들도 두려웠지만도 진펄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큰 딸애를 보는 순간 나도 함께 진펄도 들어가야 한다는 각오로 딸애를 구해 내던 그 순간과 다리 맥이 풀려 더는 갈 수 없다고 주저앉은 딸애의 귀뺨을 때리며 이끌고 오던 매 순간순간이 지금도 생각해보면 마음이 너무도 아픕니다.
그리 좋지도 않은 작은 승용차 트럭 안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수십리 길을 달리는 매 순간 아들이 걱정되어 나 자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이 이곳 한국까지 오는 순간순간은 말이 쉽지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죽을 각오로 목숨을 던지며 그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요?
3만 명의 우리 탈북자들의 희망과 소망은 그리 대단한게 아닙니다. 배고픔에서 해방되고 인간다운 새 삶과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넘게 됩니다. 중국에서의 강제 북송과 중국 공안에 쫒기며 숨어 살다가 주민등록증만이라도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그 어려움을 이겨내며 이곳 한국으로 옵니다.
오는 과정에 말 모르는 타향에서 그 누구도 모르게 허허 벌판에서 헤매다가 죽은 이들도 많고 두만강을 넘으며 북한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이들도 있으며 물살 빠른 두만강에 떠내려가 죽은 이들, 강제 북송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공개 총살당한 이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북한 당국은 진정으로 인민들을 위함이라면 왜 주민들이 그 무서움과 두려움과 죽음을 각오하며 고향을 떠나 탈북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주민들과 탈북자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쌀과 옷을 주고 땔감을 공급해주고, 자유를 갈망하는 주민들에게 인권과 자유를 준다면 이 세상에 누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려운 길을 택하겠습니까. 탈북자 가족을 두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김정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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