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날, 저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벌써 뒷산은 연두색으로 변해 있었고 활짝 핀 진달래꽃과 벚꽃들이 듬성듬성 눈에 띄었는데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아직 그늘에 들어가면 조금 춥다 할 수 있고 햇볕에서는 너무 덥다고 할 수 있는 날씨였지만 우리는 그늘에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따스한 햇살은 이제 뾰족뾰족 돋아나는 나무 잎사귀에 어울려 더더욱 황홀했습니다.
저는 벌렁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개뭉개 떠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딱따구리 한 마리가 딱딱 나무에 병충이 있는가를 진단하고 있었고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우리 머리 위에 앉았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새를 바라보며 새처럼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도 한마디 했습니다. 지난번에 판문점에 관광을 갔었는데 고향을 빤히 보면서도 갈 수 없었는데 짐승들과 새들은 철책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친구 영옥이는 설 명절을 지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 됐다고, 자식들을 찾아 데려와야 한다고, 고향에도 한 번은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쯤 북한이 개방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고, 북한 주민들이 잘 살고,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우리 탈북자들의 소망이며 희망이며 꿈입니다. 인숙이는 막걸리에 북한 명태를 뜯으며 고개를 저에게 돌려 자식들이 이곳 한국에 모두 와 있으니 걱정과 근심이 없어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행복한 여자지만, 우리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에 가보고 싶은 꿈은 한결같다고 했습니다. 사이다 잔을 입에 가져가며 저는 다시 한 번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엄마, 강하고 당당한 엄마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한 친구는 지난해에 중국에서 아들을 만났던 얘기를 했습니다.
아들은 엄마가 없으니 엄마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았다고 하면서 어린 시절 엄마의 피타는 노력으로 먹고 살았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고 했답니다. 그 친구는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아들을 꼭 품에 안아 주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10년 만에 아들을 보았는데 이제는 훨씬 자라 엄마인 자기가 오히려 아들의 품에 안기었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탈북한 뒤 아빠는 새 장가를 갔는데 그만 하늘나라로 가버렸고, 두 아들은 모두 결혼해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기 아빠가 됐지만, 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손자 역시 친할미 얼굴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언제 또 만날지 모를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헤어진 게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아직 소식 한 장 없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동네 뒷산 정상에서 따스한 봄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풀냄새, 그리고 꽃향기와 싱그러운 봄 향에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봄이면 산과 바다, 강으로 시골을 찾는구나 싶습니다. 내 고향 평양에도 거리마다, 마을마다 살구꽃, 매화꽃, 진달래, 그리고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을 겁니다.
특히 천리마상이 있는 거리에는 살구꽃이 활짝 피어있고 대동강 기슭에 꾸려 놓은 모란봉 공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많이 피었답니다. 하지만 그때엔 정말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엊그제도 저는 벚꽃이 활짝 핀 여의도 윤중로를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한강을 한 참이나 바라보며 잠깐 고향 생각을 했었습니다.
내 고향에도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대동강 물이 흐르고 있고 지금 이맘때면 대동강 기슭에 꾸려 놓은 모란봉 공원에도 꽃들이 활짝 펴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데...지나간 일들이 어느새 추억이 되어 때로는 고향 생각을 하면서 이런 상상도 해본답니다.
이곳 대한민국은 4월이 되면 유채꽃으로 시작해 갖가지 꽃이 필 때마다 곳곳에서 꽃 축제가 한창이랍니다. 이제부터 친구들과 또는 가족들과 함께 꽃 축제장을 다 찾아다녀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동네 뒷동산에서 두고 온 고향 생각을 덮을 만큼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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