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지역으로 이사 가기

2008년 7월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서 열린 국민임대주택 참아름아파트 입주식.  이 아파트에는 새터민 50가구가 정착했다.
2008년 7월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서 열린 국민임대주택 참아름아파트 입주식. 이 아파트에는 새터민 50가구가 정착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 / 0:00

제가 이곳 대한민국에 온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강 물처럼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볼 때마다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행복한 새 삶을 살고 있는 저는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그저 가는 세월이 서운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 와 살고 있는 우리 탈북자들은 해마다 정착을 돕는 더 좋은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 대한민국이 천국 같은 세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두 딸이 모두 남한 남자와 결혼해 평택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고 아들 역시 평택에 회사를 두고 있다 보니 자식들 모두 자연스레 저와 떨어져 평택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식들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 됐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인터넷으로 탈북자 주거지원을 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중 경기도 평택시 안중에서 탈북자 주거지원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를 보게 됐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우리 탈북자들이 주택신청에 우선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만 정말 우선 권한이 있다는 것을 홈페이지를 통해 보는 순간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13일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화성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 사무실에 갔습니다. 나름대로 일찍 떠났지만 기다려야 하는 순번은 110번이었습니다. 현 거주지가 서울이라 조금 미타한(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순서가 되어 저는 대담하게 서류 접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파트를 분양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선순위를 부여받기 위해 드는 저축인 주택청약예금의 기간이 조금 짧은 탓에 1순위로 접수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저녁에 다시 홈페이지를 검색했습니다. 다음날 2순위를 접수한다고 공지에 씌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저는 다시 버스를 타고 전철을 바꿔 타고 또다시 버스를 바꿔 타면서 다시 한국토지주택공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일찍 갔는지 순번은 1등이었습니다. 일꾼들이 출근해 접수를 시작하자마자 저는 맨 처음으로 서류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는 당첨 발표 날까지 한 달이라는 기간을 1년 맞잡이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지난해 12월 21일 당첨이 발표됐습니다. 저는 당첨 발표 결과를 자식들에게 전화로 알렸습니다.

당첨 이후 계약할 수 있는 날짜까지는 약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지난주였습니다. 계약 통지서를 받아든 저는 요즘 자식들 가까이로 이사를 간다는 마음으로 조금 들뜬 기분이랍니다. 가끔 아니, 자주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 온 우리 탈북자들의 생활은 북한 주민들로서는 상상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에 온 우리 탈북자들은 서울이든 지방이든 그 어디에 살든 또 누구든 직업에 관계없이 평양시 광복거리나 버드나무 거리, 통일 거리 못지않은 아주 좋은 살림집을 정부에서 배정받아 살고 있습니다. 또 본인이 살고 싶은 곳, 서울이든, 제주도든, 그 어디든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거주 전입신고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거주의 자유가 없습니다. 국가에서 배정해 주는 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또 북한에선 직장 가까이에 살고 싶어도 국가의 허가가 없으면 아무리 소원이라고 해도 살 수 없습니다.

시 배정과에서 받는 입사증 발급도 매우 어렵습니다. 기업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아파트를 건설했다면 기업소에서 우선 배정을 하고 시 배정과에서 입사증을 발급해 줍니다. 개별적으로 호상 간에 약속을 하고 집을 교환 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하기에 북한 주민들은 한 번 집을 배정받으면 죽을 때까지 대를 이어 살아야 합니다. 식구가 늘어나도 10평방이든 5평방이든 아버지가 살고 아들이 살고 손자가 살아야 합니다. 제가 5평방도 안 되는 넓이 3제곱미터, 그것도 뒷마당 쪽으로 조금 넓혀서 5제곱미터였거든요.

이런 작은 집 단칸에서 18년을 살았습니다. 통일 거리건설이 끝나자 기업소의 조정으로 저는 방 2칸인 뒷그루가(후순위) 차례졌습니다. 시에서 입사증을 발급받아 이사를 갔는데 그 뒷그루마저도 공병8총국 건물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먼저 재빠르게 이사를 해 집을 차지했지만 8총국배정과에서 입사증을 떼 가지고 온 공병국 장교가 당장 집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저는 집을 놓고 매일 같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말이 다툼이지 그야말로 집을 내놓고 한지에 나가 앉을 것인지 아니면 집을 쟁취 할 것인지의 전쟁이었습니다. 근 6개월 만에 동사무장과 사업을 해 결국에는 그 집을 쟁취하게 됐고 공병국 장교는 형제산 구역 신미리에서 살고 있었지만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동거인으로 거주를 했습니다.

형제산 구역도 평양시에 속해 있지만 평양 시내와 그 주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요. 제가 탈북하고 남편인 당원이 장사를 했다는 죄, 무단결근했다는 죄로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교도소로 가자 북한 당국에서는 부모가 없는 제 아들을 형제산 구역 관리소로 보내고 집을 강제로 빼앗아 그 장교에게 줬다고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탈북자들의 나이와 관계없이 혼자 왔던, 가족이 왔던 식구 수에 맞게 아파트를 공급해 줍니다. 맨 처음 서울에서 무상으로 배정받은 집도 20평이었지만 제가 지금 당첨되어 계약한 집도 20평이나 되는 고급 아파트랍니다. 저는 지금 이사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