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는 친구들과 함께 파주에 고구마를 심으러 다녀왔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저는 아침 일찍 버스와 전철을 바꿔 타면서 삼송역으로 갔습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자가용 승용차가 마중 와있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1년이 조금 지난 사이에 너무도 많이 변해 버린 벽제 시내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4명씩 한 조를 이뤄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비닐 박막을 씌운 고랑위에 구멍을 뚫으면 다음 사람은 고구마 싹을 넣고 또 다음 사람은 물을 부어 줍니다. 다음 친구는 흙으로 고구마 싹을 묻어 줍니다.
우리가 빠른 시간 내에 속도전으로 심고 가자고 북한 언어로 말하자, 목사님과 사모님은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고구마 2000싹과 오이, 그리고 상추와 호박모를 2시간 안에 모두 심었습니다. 또 시간을 만들어 쑥과 민들레도 뜯었습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12인조 승용차를 타고 통일 전망대가 바라보이는 오두산마을 메밀국수 집으로 갔습니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이라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메밀국수 곱빼기를 시켰고 메밀묵에 시원한 막걸리와 시원한 맥주도 곁들여 한 잔 했습니다.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고 오래 전에 이미 알고 지내던 친구도 있었지만 모두 우리는 한 가족 같았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먹는 메밀국수 맛이 별맛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는 자유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저는 언제 한 번 고향에 가 볼 수 있을까, 코앞에서 빤히 바라보면서도 갈 수 없는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고구마를 심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군인이라 평양시 승호구역에서 살았거든요. 승호구역은 평양시 중심이 아니라 시외에 있었기에 그때에는 밭이 조금 있었습니다. 미리 고구마 싹을 키우기 위해 우선 따뜻한 아랫목에 나무 널판자 통을 만들어 놓고는 모래를 깔고 고구마를 놓고 다시 모래를 뿌려 싹을 키웁니다.
어느 정도 자란 고구마 싹을 물을 담아놓은 큰 소랭이(대야)에 담가 놓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짬짬이 삽으로 밭을 파고 고랑을 만들어 놓곤 합니다. 일요일이면 모두 쉬는 날이라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따라 밭으로 갑니다.
어머니는 돼지 두엄을 비료 삼아 고랑에 뿌리면 당시 인민학교 4학년이었던 언니는 어머니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그 위에 고구마 싹을 한 개씩 놓으면 유치원에 다니던 저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흙을 묻어주곤 했고 또 내 동생은 그 아래 동생을 잔등에 업고 철철 흐르는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힘들다고 하소연 하던 모습이 화면처럼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고구마를 심는 날이면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식구는 모두 빨간 흙투성이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고구마를 심어보고는 제 나이 처음이기도 합니다만 한국에 와서도 처음 심어보는 고구마였습니다. 아마 저는 고구마를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고구마 심는 자원봉사일은 저에게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도 했고 또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식 고구마 심는 방법은 너무도 쉬웠습니다. 친구들은 고구마를 심는 일도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차를 타고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구경도 더욱 즐겁고 좋았다고 합니다.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헤어지기가 조금 아쉬워 경순 언니 집으로 갔습니다.
비록 무더운 날씨였지만 따스한 커피 한 잔을 놓고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19개월 된 아기도 있었습니다. 아기의 재롱을 두고 우리는 '돈다발을 앞에 놓고 아무리 웃으려고 애를 써 보아도 웃음이 나오지 않지만 아무리 돈이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도 재롱을 부리는 아기를 두고 행복한 웃음 가득했었다'는 옛날 속담이 틀린 말없다면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습니다.
이름 모를 파주의 작은 야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구마 심는 좋은 추억을 만들었고 가족과 함께 시원한 쑥 국과 민들레 무침으로 맛있게 먹을 저녁 식사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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