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손으로 직접 모내기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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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달이기도 합니다만 1년의 곡간을 채워 주는 중요한 달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말 저는 모내기를 했거든요. 아마도 한 20년 만에 그리고 이곳 한국에서 처음 내 손으로 직접 모를 꽂았습니다. 모내는 기계가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며 모를 꽂아 갑니다.

물결이 출렁이던 200평 남짓이 되는 논밭에 잠깐 사이 벌써 파란 녹색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빈틈없이 모를 꽂아 가는 모내는 기계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네요. 30분 전 만해도 '저걸 언제 다 심나'하는 근심과 걱정이 많았던 논벌이 잠깐 사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고향에서의 모내기 농촌 동원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평양에서 나서 자란 제가 군복을 입고 부대에 도착한 날이 바로 5월 20일 이었거든요. 언제 한번 모내기를 해보지 못한 제가 부대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모내기 전투장에 나갔습니다.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볏모 한줌을 손에 들고 물에 들어서는 순간 옆에서 한창 모를 꽂던 구대원의 장단지에 거머리가 붙어 피를 빨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풀에 놀랐던 제가 한 100m는 달아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두려웠던 생각으로 논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찾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남편이었습니다. 모내는 기계로 한창 모를 심어가는 그 옆에 작은 뙈기 논밭이 있었는데 모를 심자고 하면서 북한식 방법으로 한번 해보자고 덧붙였습니다.

순간 한 번 시범을 보이겠다는 자부심이 생겨 운동화를 빨간 고무장화로 바꾸어 신고 벌판에 들어갔습니다. 겨우 3명이 나란히 섰습니다. 볏모를 부지런히 꽂아 가던 남편이 점 점 제 곁으로 다가와 자리가 좁혀 지네요.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넘어졌습니다. 그만 옷이 다 젖었습니다.

모내기는 점심 전에 끝났습니다. 주인 사모님이 막걸리에 김치부침개에 골뱅이무침에 매콤한 족발을 들고 왔습니다. 비록 벌판이지만 또 무더운 뙤약볕 아래였지만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는 시원한 컨테이너 안은 시원했습니다. 비록 논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감탕에 젖은 옷에 허리는 조금 아팠지만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행복과 즐거움과 함께 항상 그러하듯이 지나간 추억이 떠오르네요. 황해도 신계에서 군 생활을 하던 시절 한창 모를 꽂고 있는데 새참 음식이 준비 되었다고 아주머니가 우리를 불렀습니다. 팥죽 한가득 들어 있는 물동이를 보는 순간 놀랐거든요. 팥죽은 동짓날에만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팥죽이 너무 맛있어 한 그릇 먹고 더 요청했습니다. 다음 날 새참 음식은 옥수수 국수였습니다. 하기에 '새참' 하면 팥죽을 먹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에는 '전당, 전 국적으로 모내기 전투에 총 동원하자' 라는 구호를 걸고 밥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무조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합니다.

한창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주민들을 모내기 전투와 김매기 전투에 동원시키기가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밤새 생각하던 저는 인민반에 있는 군인 가족과 안전원 가족을 모아놓고 농촌 전투에 동원되는 대신 점심 도시락을 몇 개 만들도록 조직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모내기 전투와 김매기 전투라는 명목으로 식량 공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서도 일체 장사와 이동을 하지 못하게 강한 통제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고향 주민들은 모내기 전투 명목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고 어렵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짠해 오네요.

하지만 저에게는 모내기철 하면 좋은 기억도 있습니다.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내 고향에서는 그나마 시 주변에 모내기 동원되었을 때 쉬는 시간을 이용해 짬짬이 미나리도 뜯어다가 미나리나물도 무치고 또 미나리를 삶아 말려 두었다가 장마철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쑥을 뜯어다가 쑥떡도 만들어 밥상에 올려놓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벌판에서 내 손으로 직접 모를 꽂는 좋은 경험과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