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는 아들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평택에 다녀왔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벌판에 모내기 준비로 물을 대고 밭갈이로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파란 옷으로 바꾸어 입은 벌판에는 볏모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모내기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잠깐 차 속도를 줄이게 하고는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벌판에서 바람과 함께 안겨오는 싫지 않은 싱그러운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차창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고향에서도 자주 맡아 보던 냄새였습니다. 금방 꽂아 놓은 물에 잠긴 모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니 왠지 저의 기분은 벌써 풍년든 가을을 바라보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넓은 벌판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세월이 너무도 빨리 흘러가는 것에 대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바늘이라면 거꾸로 돌려놓을 수 있으련만 하고 생각하는데 논 한쪽에서 빙글빙글 돌며 모를 심고 있는 기계 모서리마다 따라다니며 한 포기라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보며 모를 심는 한 어르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어르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조금 싱거웠지만 저를 알아보는 듯했습니다. 아들은 뜬금없이 아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모른다는 제 말에 아들은 싱거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대한민국은 도시보다도 공기 좋은 시골이 더 살기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지금 북한에서도 한창 모내기철이라 모내기 전투를 하고 있겠지.' 하더니 지난 추억에 대해 마치 옛말을 하듯이 말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생이 된 아들은 학교에서 강냉이 영양 단지 옮겨심기 위해 평양시 락랑구역 주변의 협동농장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체 농법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어린학생들에게 지도농민은 긴 회초리를 손에 들고 강냉이 영양 단지를 주체 농법대로 심어야 한다고 가르쳤답니다.
5명씩 조를 짜주고는 지도농민과 담임선생이 보이지 않자 어린 학생들은 넓은 벌판에 선주 없는 세상과도 같았다고 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 나뭇가지로 만든 센치미터 자를 한손에 쥐고 다른 한손에는 호미를 들고 구덩이를 열심히 팠고 또 한 학생은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열심히 물을 길어오면 다른 학생은 자기 손보다도 큰 바가지로 구덩이마다 물을 부었고 또 한 친구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영양 단지를 구멍마다 한 개씩 놓으면 또 한 친구는 흙을 덮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담임선생과 지도농민이 보이지 않으니 한창 개구쟁이였던 아이들은 벌판이 마치 학교 운동장인 것처럼 뛰어다니며 노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일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이 될 무렵이 돼야 담임선생님도 지도농민도 귀신 같이 나타나서는 주체 농법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회초리로 때리곤 했다고 합니다.
아들도 3번 정도 맞았는데 그 때마다 주인집 굴뚝 모서리에 가서 남모르게 몇 시간을 울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때 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아직도 주체 농법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주체 농법은 주체사상에 따라 시행하는 북한식 농사법의 하나로서 기후 토질과 농작물의 생물학적 특성에 맞게 주체 농법의 요구대로 알곡 생산에서 큰 성과를 낸다는 농사법을 말합니다.
한창 학교에서 공부만 해도 모자랄 아이들이었고 중학교 1학년이면 13살이었는데 그 나이면 한창 부모 손끝에서 응석을 부릴 개구쟁이들이 주체농법을 알아야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철없는 개구쟁이 10대 어린 소년들에게 아무리 주체 농법이 좋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정일 독재 체제의 실패 원인은 주체농법의 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역시 주체 농법이 좋다는 말은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처럼 들어 왔지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햇곡식이 나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북한은 식량 사정이 어렵지만 특히 모내기가 끝나고 밀과 햇감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보릿고개라 말할 수 없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지난날 북한사회에서 겪어 너무도 잘 아는 현실입니다.
전쟁광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 공급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서 총포탄 정신으로 주민뿐만 아니라 군인들 그리고 어린 10대 개구쟁이 소년들에게까지도 모내기 전투에 내몰고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내기를 하다가도, 강냉이 영양 단지를 심다가도, 뜨거운 햇볕에 김을 매다가도 배고프면 남모르게 슬그머니 흐르는 개울물을 한바가지 퍼 마시던 지나간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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